종종 기름진 요리나 달콤한 음식은 소박한 생활에 금기로 여겨졌다. 극적인 맛으로 미각을 깨우는 것은 곧 인간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영화 ‘초콜릿’에서 여주인공 줄리엣 비노쉬는 기독교인들의 공식적인 금욕기간인 사순절에 미사를 거부하고 초콜릿 가게를 연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만, 결국 사람들은 초콜릿의 달콤함으로 바짝 마른 낙엽 같던 마음에 싱그러운 봄 꽃을 피운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가장 빠른 열쇠는 혀의 감각을 깨우는 맛인 셈이다.
해마다 2월이 되면 사랑을 고백하거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괜스레 분주해진다. 일년 중 사랑을 고백하기 가장 좋다는 밸런타인데이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 가치와 효용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이면 초콜릿은 물론, 꽃과 케이크, 와인도 불티나게 팔린다. 그 중 하나만 고르라면, 밸런타인데이엔 단연 초콜릿이다. 초콜릿엔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나오는 호르몬인 페닐에틸아민이 들어있어 ‘사랑의 최음제’란 별명도 붙었다. 때문에 달콤한 디저트를 주로 만드는 세계의 셰프들에게도 독특하고 개성있는 초콜릿을 개발하는 일은 중요한 도전 과제가 됐다.
서울신라호텔의 밸런타인데이 행사에 초청돼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프로모션 중인 위그 푸제(Hugue Pougetㆍ34)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 출신인 그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 경연대회인 ‘프렌치 디저트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머쥔, 디저트의 달인이다.
그가 만드는 초콜릿은 천연 과즙으로 속을 채운 반구 형태다. 일반적으로 과일 향료나 추출물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그는 천연 과일에서 추출한 퓨레나 과일 껍질, 혹은 이파리까지 갈아서 이용해 과일 본연의 향을 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과일향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의 초콜릿엔 하나의 과일만 사용해요. 무조건 제철 과일을 사용하는데, 미라벨(Mirabelleㆍ작은 살구처럼 생긴 여름 과일)같은 건 보름밖에 안 나오고 체리도 한 달만 나와서 기간을 정해놓고 사용하진 못합니다. 시즌이 끝나가면 다음 과일을 선택해서 개발하는 식이죠. 감귤류인 콤바와(Combawa)는 9월부터 12월까지 많이 쓰고, 여름에는 체리와 블랙 커런트, 라즈베리, 딸기와 같은 레드 베리류를 사용해요. 봄철 프랑스에는 좋은 과일이 없어서 프레쉬 원두나 피스타치오를 사용하고, 가을에는 프랑스의 유명한 무화과 마을에서 무화과를 가져다 쓰죠.”
이번 한국 방문을 기념해 그는 한국의 제철과일로 초콜릿을 개발했다. 호텔 측에서 제안한 감, 한라봉, 천혜향, 귤 가운데 그는 한라봉을 택했다. 한라봉의 이파리와 껍질에서 갈아낸 주황색과 초록색, 하얀색이 반짝이듯 채색된 초콜릿 속엔 한라봉즙이 가득 담겨 있다. 인공향료가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한라봉 맛이나 향이 강하진 않았다.
“시트러스(감귤류) 계열을 좋아해요. 탄제린, 블러드 오렌지, 콤바와 같은. 한라봉은 탄제린과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맛이 있어서 선택했어요. 거기서 느껴지는 여러 가지 맛을 끌어내고 싶어서 껍질은 겉면을 갈아 본연의 향이 날 수 있게 했어요. 제 초콜릿은 많이 달거나 향이 강하진 않아요. 제철 과일을 사용할 때는 과일 자체에 당도가 있어 설탕 사용은 거의 하지 않거든요. 요리에 후추와 소금으로 간하듯 마지막에 아주 조금만 넣죠. 보통 디저트는 식사 후에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설탕을 많이 넣을수록 디저트가 부담스러워지고 그렇게 즐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푸제씨는 때때로 표면이 매끈하고 반짝거리는 초콜릿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껍질을 얇게 만드는 것이다.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면 바삭한 초콜릿 껍질이 깨지면서 그 안에서 과즙이나 곱게 간 견과류 혹은 캐러멜이 나와 부드럽게 혀를 감싼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숙련기술이 요구된단다. “초콜릿 모형을 뜰 때 기포가 많이 생기거든요. 얇은 껍질에 기포가 생기지 않게 하려면 특별 제작한 틀도 필요하지만 손이 참 많이 갑니다. 쉽게 부서지지 않으면서도 바삭한 질감을 살려내는 게 중요해요. 그게 저의 비법이기도 하구요.”
초콜릿 원액은 베네수엘라, 마다가스카르, 콜롬비아, 탄자니아 등의 원산지에서 구입한다. 토양과 강수량 등 환경과 기후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초콜릿은 와인과 치즈처럼 그 맛도 조금씩 다르다고. “탄자니아, 가나, 베네수엘라산을 특히 많이 써요. 탄자니아산은 약간의 베리향이 나면서 산도가 있는 편이죠. 베네수엘라산은 맛이 좀 강하고, 훈제향이 약간 나기도 합니다. 가나산은 밀크초콜릿을 만들기에 적합해요.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초콜릿이라고 보면 되죠.”
디저트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내면서도 그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창의적인 사고방식이 필수다. 창의성에 대한 푸제의 관심은 그가 개발해온 초콜릿을 비롯한 디저트뿐 아니라 그의 명함에도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공동 오너이자 수석 셰프를 맡고 있는 디저트 가게 ‘위고 에 빅토르(Hugo et Victor)’의 셰프가 아닌 ‘창작자(créteur)’로 적어 놓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면서 새롭게 창조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단순히 셰프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디저트 메뉴는 물론이고 주얼리 매장처럼 꾸민 숍이나 멋진 한 권의 책처럼 보이는 포장 박스도 기존의 디저트 숍과는 차별화하고 싶어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거든요.”
가게 이름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이름과 성을 바꾼 것. 푸제씨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뉴요커들이 식사 후 어김없이 디저트 카페 페이야드를 찾듯이 파리의 잘나가는 트렌드세터들이 디저트를 구입하기 위해 이 곳을 찾는다고 자랑했다. 2010년 오픈했지만 벌써 파리 최고라는 명성을 누리는 것도 이 같은 창의성에 기대어 있다는 말이다.
독특한 매장 콘셉트보다 유명한 것은 역시 초콜릿, 마카롱, 타르트 같은 디저트의 맛이다. 매년 1,2월에 열리며 세계의 유명 쇼콜라티에가 실력을 겨루는 일본의 초콜릿 페어, 살롱 드 쇼콜라에서 그는 2년 연속 초청을 받았고 경연에서 잇달아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가 만든 초콜릿은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위고 에 빅토르’의 하우스 소믈리에는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과 짝을 이뤄 완벽한 맛을 즐길 수 있게 한다.
한국에서 김치와 막걸리를 함께 먹듯 디저트에 와인을 곁들이는 것은 프랑스에선 일반적이다. 식사 때 와인이 빠지지 않는 프랑스에서는 보통 디저트와 샴페인 혹은 달콤한 화이트 와인인 소테른 와인을 곁들이지만 ‘위고 에 빅토르’에서는 디저트 맛에 따라 어울리는 와인을 소믈리에가 직접 매칭한다.
한국에선 요리사가 집에서는 정작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푸제씨도 집에서는 소박하게 디저트를 챙겨 먹는다고 한다. 때론 가게에서 만든 디저트를 가져다 먹기도 하지만 주로 과일이 들어간 클라푸티(clafoutis) 같은 프랑스 사람들이 즐겨먹는 간단한 전통 디저트를 해 먹는다고. “오목한 그릇에 버터와 설탕을 깔고 체리나 복숭아 같은 과일을 올린 다음 그 위에 달걀과 밀가루를 반죽해 덮어서 올려서 오븐에 구우면 되죠. 오믈렛이나 푸딩처럼 말랑말랑한데 달콤해서 좋아하는 디저트 중 하나예요.”
어릴 적부터 요리를 좋아해 열 네 살부터 정식교육을 받았다는 푸제씨. 열정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그는 이제 겨우 30대 중반이지만 여느 장인들처럼 거창한 철학이 있을까. 스물 넷에 이미 세계 레스토랑 평가서인 미슐랭에서 최고등급인 별 셋을 받은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그는 당시 뉴욕타임스에도 나올 만큼 주목을 받았지만 “아직 철학이라 할 만한 건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가 욕심을 내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위고 에 빅토르’ 디저트라는 것을 알 정도로 개성 있는 디저트를 만드는 것. 이를 위해선 끊임없이 생각하고 꾸준히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여행이 유효했던 것 같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준 여권에는 200여개의 출입국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발급 받은 지 겨우 2년 된 여권이란다. 한국 방문도 벌써 네 번째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 비빔밥, 숯불갈비, 김치찌개 같은 음식 이름들을 술술 읊어댄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만두라고. 그의 세 살짜리 아들도 만두를 정말 좋아한다며 활짝 웃었다.
“인터뷰여서가 아니라 정말로 좋아해요. 일이 많아서 아들과 잘 놀아주지 못하지만 우리 가족이 외식할 때마다 파리에 있는 작은 한국식당에서 꼭 만두를 먹을 정도죠. 아내가 브라질 사람이고, 아들도 반은 브라질, 반은 프랑스인이라 그런지 입맛도 국제적인가봐요.”
그는 하우스 소믈리에와 와인의 디테일한 맛을 느끼면서 가장 큰 재산인 미각을 훈련한다고 했다. 그의 예리한 미각과 창의성으로 만들어낸 케이크와 타르트, 초콜릿, 마카롱 등의 다양한 디저트를 서울신라호텔 디저트 숍 패스트리 부티크와 카페 더 라이브러리에서 9일부터 14일까지 맛볼 수 있다. 1만원부터 6만원 대까지. (02) 2230-3374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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