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성장을 멈추지 않은 소년의 푸른 힘줄 같다. 눈 내리는 날의 대나무. 팽팽히 긴장된 황록의 직선이 쏟아지는 백색 하늘의 무게에 눌려 몸을 훌쳤다가 튀기며 차가운 빛가루를 뿌려 놓는다. 유연하지만 옹골지게 단단한 생명의 기운. 한 그루의 대나무나 수천 그루가 무리를 이룬 숲이나 느낌은 같다. 옛 사람들은 이 모습에서 세한고절(歲寒孤節)의 기개를 찾았다. 그 말뜻이야 시들어버린 지 오래지만 대나무의 푸른 빛은 여전히 겨울에 더 시리게 다가온다. 대설주의보 내린 지난 주, 겨울의 푸르름을 찾아 전남 담양으로 향했다.
삼다리 대밭 가는 길. 예보와 달리 눈은 바닥의 차선을 간신히 지울 정도만 쌓였다. 담양 읍내에서 장성 방향으로 메타세쿼이아가 점점이 서 있는 길 따라 차로 10여분 만에 닿을 수 있었다. 관광지로 '개발'한 대밭과 달리 이곳 대밭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생업의 공간이다. 외다, 서다, 동다 세 부락을 묶어 부르는 삼다리는 죽세공으로 유명했던 곳. 주민들 얘기에 따르면 일제 시대엔 이 밭의 대나무로 군용 반합을 만들기도 했단다. 하지만 중국산 죽제품이 밀려들면서 지금은 겨우 명맥만 잇고 있다고 했다. 요샌 죽로차(대숲에서 자란 차)를 주로 만든다.
마을 서쪽의 느티나무 거수가 당산나무다. 대숲 입구에 문지기처럼 서 있다. 플라스틱 살림도구를 쓰기 전엔 놋그릇과 사기를 빼면 대부분의 생활용품이 대나무였다. 죽세공 하는 마을은 윤택했고 주민들은 대밭을 '생금밭'이라고 불렀다. 이 느티나무는 삼다리 금밭의 파수꾼인 셈. 입구의 대밭은 사유지다. 땅 주인 할아버지가 출입문을 열어줬다. 눈발이 그친 한낮, 그러나 쉽게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죽은 대와 어린 대가 뒤엉킨 컴컴한 숲으로 난 좁은 오솔길이 으스스했기 때문이다. 사람 손을 탄 지 오래된 대숲이었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등을 떠밀었다.
"대 찾아왔담서 뭔 겁이 그리 많은가? 대밭은 원래 이런 겨. 읍내처럼 다듬어 놓은 데서 자라는 대는 암짝도 못 써."
오솔길은 시루봉 정상까지 이어진다. 마을 주민들이 죽림욕을 즐길 수 있는 걷기 여행 코스로 조성 중인 대숲길이다. 찬바람 부는 숲길은 적막했다. 10m가 넘는 왕대와 산죽, 맹종죽 등 각종 대나무가 좁은 길 옆으로 발 디딜 틈 없이 솟아 있다. 조금 들어가니 길이 넓어지고 하늘이 열린다. 겨우 등산화 자국을 남길 만큼 쌓인 눈길인데도 뽀드득 밟히는 감촉에 찰기가 있다. 솨-솨-솨-. 걸음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높은 곳에서 흘러내렸다. 밀생하는 대숲의 잎사귀는 옅은 바람에도 청량한 마찰음을 선물했다. 소리가 내리는 우듬지 끝에 겨울의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자생 대숲에 들어와보면 대나무의 종류가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가슴 높이까지 자라는 조릿대부터 30m가까이 뻗는 왕대까지 다양하다. 조릿대는 5년, 왕대는 60년을 주기로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운 대는 죽는다. 평생 단 한 번 꽃을 피우는데, 그 순간 영양을 다 소모해버리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땅속 줄기로 서로 연결돼 있어 하나가 죽으면 대밭을 통째로 망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대는 꽃을 피우기 전에 잘라버려야 한다고, 삼다리 할아버지는 설명했다. 목숨을 다해 피워내는 꽃의 빛깔이 못내 궁금했다.
다시 읍내로 향했다. 대숲을 찾는 외지인들에게 유명한 죽녹원이 읍내에 있다. 가까운 곳의 관방제림(천연기념물 제366호)처럼 오래된 느낌의 이름이지만, 개장한 지 채 10년이 안 된 공원이다. 모두 2.2㎞의 산책로가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길 등의 8가지 주제로 얽혀 있다. 사각거리는 댓잎 소리를 들으려면 일찍 이곳을 찾아야 한다. 늘 관람객이 붐비기 때문이다. 멀끔히 제설작업까지 해뒀다. 눈에 덮인 대숲을 찾아온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테두리를 친 대숲 사잇길로 각 지방의 사투리가 섞여 왁자하게 흘렀다.
읍내에서 순창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 유명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막 벗어나 또 하나의 인공 죽림인 대나무골 테마공원이 있다. 퇴직한 언론인 부부가 30여년 동안 가꾼 대나무 숲이다. 이곳은 비교적 호젓했다. 청년기의 대숲이 묵직한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가늘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나무는 제 몸에 눈이 묻는 것이 싫은 듯 작은 바람 조각에도 바지런히 잎사귀를 떨었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댓잎이 털어낸 눈가루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눈에 향이 있을 리 없는데, 은은하게 아리는 느낌이 오래 코끝에 감돌았다.
담양=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대통밥, 죽향 그윽한 정기를 맛보다
이제 세간붙이로는 큰 소용이 없는 대나무지만 요긴하게 쓰이는 곳이 있다. 그냥 마디를 잘라서 만든 밥통이다. 담양 땅에 오면 대나무 통에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다.
대통밥은 2년 이상 자란 왕대를 잘라 쌀과 은행, 밤, 대추, 잣 등을 넣어 만든다. 대나무는 반년도 안 돼 다 자라지만, 밥을 짓는 통으로 쓸 만큼 단단해지려면 최소 2년 이상 자라야 한다. 재료를 물에 불린 뒤 대나무 통에 담고 한지로 뚜껑을 만들어 덮은 다음 압력솥에 쪄서 만든다. 상엔 한지 뚜껑이 덮인 채로 오르는데, 뚜껑을 걷어낼 때 훅 하고 끼치는 온기와 대나무 향이 대통밥의 매력이다.
한의학에 따르면 대통밥에는 각각 항균ㆍ진정 작용을 하는 죽력(즙)과 죽황(진액이 뭉친 알갱이)이 스며들어 있어 건강에 좋다.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대통은 한 번 쓰고 버려야 한다. 대통밥을 파는 담양의 식당들은 먹고 남은 대통을 손님들이 가져가도록 한다. 죽순 된장국이 딸려 나오는 집도 있다. 죽림원, 소쇄원 등 관광지 주변과 담양에서 순창으로 이어진 24번 국도변에 대통밥집이 많다. 담양군 관광레저과 (061)380-3150.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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