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저녁에')
가을날 낙엽 떨어지는 심상한 풍경이 시인을 만나 우주적 찰나로 전화(轉化)된다. 이시영(63)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창비 발행)는 짧은 문구로 더할 나위 없이 시적(詩的)인 순간을 포착한 시들로 그득하다. '영하 13도의 연희동 겨울날 아침, 백년추어탕집 수족관 수염 난 미꾸라지들이 꼬리를 말아 세운 채 꽝꽝 얼어붙어 있다. 자세히 보니 없는 팔을 필사적으로 내밀어 서로의 목을 따스히 끌어안고 있다.'('겨울날') 경찰은>
등단한 지 42년, 어느덧 이순을 넘어선 시인의 감수성이 어찌 이리도 파릇한 것일까 궁금히 여기던 차에 시인이 말한다. "사진을 참 좋아합니다. 순간의 예술이잖아요." 이어 불세출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그의 대표작 '무프타르 거리, 파리'(1952)를 언급하며 자기 시의 지향점을 한층 더 분명히 밝힌다. "포도주 병을 들고 파리 뒷골목을 걷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브레송은 2차 대전 이후 파리의 사회상, 사람들의 심리, 가난을 순간 포착해냈어요. 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에서 오는 마음의 파장을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순간에 포착해야 자연스러운 시가 나오죠."
시인은 시의 형식과 내용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치열한 문학 정신으로 정평이 있다. 1970, 80년대 리얼리즘, 민중문학의 지평에서 삶의 애환을 절절히 담아낸 '이야기시'를 개척했고, 90년대 들어 서정의 순도를 높인 짧은 시로 변화를 감행했다. 2007년에 펴낸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에서는 신문 기사를 그대로 옮겨 세계의 야만을 폭로하는, 이른바 '인용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해 주목 받았다. 이번에도 시인은 몇 편의 인용시_그중 한 편의 제목은 '아, 이런 시는 제발 그만 쓰고 싶다'이다_로 팔레스타인 유혈 사태,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조명하는데, 이 하드보일드한 시들이 전하는 비극은 웬만한 문학적 수사로는 감당 못할 만큼 선명하다. 우리의>
"시인을 참여 시인으로 만드는 시대"로 현 시국을 진단하는 그의 인식 또한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선시(禪詩)로 봐도 무방할 만큼 여운 깊은 짧은 시들 한켠으로 용산참사, 4대강 사업, 구제역 매몰지 침출수, 일본 원전 사고 등을 향한 첨예한 비판을 담은 작품들이 불뚝하다. '이날의 투입작전은 경찰 한 명을 포함, 여섯 구의 숯처럼 까맣게 탄 시신을 망루 안에 남긴 채 끝났으나 애초에 경찰은 철거민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철거민 또한 그들은 전혀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에서)
하지만 이번 시집의 주인공 격인 시편들은 따로 있다. '아침의 몽상' '저녁의 몽상' '마음의 길' '싸락눈 내리는 저녁' 같은, 육십고개를 넘은 시인이 삶에 대한 성찰과 회한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예컨대 시인은 호수를 유영하는 오리를 바라보면서 '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는 것'('저녁의 몽상'에서)이라며 다시금 생의 의지를 추스른다. "살아온 것보다 살아갈 세월이 적은 나이가 된 만큼 인간의 깊은 내면을 실어내고 싶다. 그동안 사회와 많이 대화해 왔으니 이젠 자신과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시인은 또 한 번의 시적 갱신에 착수한 이유를 밝혔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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