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에서 친환경 딸기농장을 운영하는 김모(50)씨는 지난해 2월 광주의 한 대형마트에 26㎡ 규모 매장을 냈다. 대형마트가 떼가는 판매수수료는 총 매출의 35%. 높은 수수료 탓에 처음엔 적자가 났지만 3개월이 지나자 단골 고객이 점차 늘면서 순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겨우 매장이 자리를 잡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마트 측에서 계약 해지를 통보해 왔다. “위탁 매장을 없애라는 회사 방침”이라고 둘러댔지만 실은 직판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김씨는 “엄청난 수수료를 챙기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친환경 제품이 잘 팔리는 지 위탁 매장을 통해 실험해 보고, 되겠다 싶으니 결국 내친 셈”이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웰빙 바람과 소득수준 향상으로 친환경농산물 시장 규모가 급증하고 있지만 어느새 최대 유통경로로 자리잡은 대형 할인마트의 횡포에 농민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유통 파워를 앞세운 ‘갑(甲)의 횡포’가 일반 공산품이나 식품에 그치지 않고 기술경쟁력이 강조되는 특화작물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3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국내에서 소비되는 친환경농산물의 40%는 대형마트를 통해 팔리고 있다. 연구원이 작년 12월 30일부터 지난달 6일까지 서울, 경기, 인천 등 수도권 주부 526명을 대상으로 친환경농산물 구입처를 조사한 결과, 210명(40%)이 대형마트를 꼽았다. 이어 하나로마트 등 농협계열 15.3%, 생협 등 친환경전문매장 13.6%, 직거래단체 11.8%, 백화점 7.2% 순이었다. 주부들이 대형마트를 애용하는 이유는 특유의 편리성 때문. 생산자 입장에서도 365일 문을 여는 대형마트에 납품하면 연중 판로가 열리고 대규모로 물량을 처리할 수 있어 유리하다.
이러다 보니 친환경농산물 생산자들은 정기할인 행사 등이 있으면 대형마트가 요구하는 납품단가에 맞추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다.
경기 남양주시 6만6,000㎡ 규모 농장에서 회원들과 엽채류를 길러 서울의 대형마트 2곳에 납품하던 이모(47)씨는 대형마트의 횡포에 결국 납품을 포기했다. 정기할인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단가를 낮추다 보니 인건비를 빼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씨는 판로를 돌려 지역 단위농협과 학교 급식 쪽으로 전환했다.
전국친환경농어민연합회 관계자는 “친환경농산물 생산자가 급증하고 밴더(중간유통업자)들도 늘면서 대형마트 측이 특정 납품단가를 정하면 밴더는 이를 생산자 단체에 전가해 가격을 인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전했다.
경기 안성에서 10여년 간 친환경 농사를 지어 온 김모(48)씨도 “일반 농산물은 시세에 따라 가격 변화가 심하지만, 친환경농산물은 매년 봄 대형마트와 거래할 때 미리 가격과 물량을 정하기 때문에 일반 농산물보다 더 싸게 팔 때도 있다”며 “특히 마트 할인행사 때는 최저 가격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생산원가에도 못 미치는 단가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왜곡된 유통구조 속에서도 친환경농산물 시장은 급성장세다. 2001년 인증제 도입 당시 8만7,000톤이던 생산량은 2010년 221만5,000톤으로 25배 치솟았다. 시장 규모도 2010년 3조6,000억원에서 2020년 6조6,000억원으로 급증할 전망이다. 농촌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유통 과정에서 생산농가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장기계약을 통해 계약의 안전성을 높이고 과도한 단가인하로 출혈경쟁을 시키는 행위는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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