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내륙의 키르기스스탄에서 겨울 나그네가 되어 머물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었다가 1991년 독립한 이 나라는 어디서든 만년설을 이고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이 보입니다. 너비 400km, 길이 2,000km나 되는 이 산맥을 톈산(天山)이라 부릅니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는 최근 두 차례의 유혈 사태를 겪은 도시답지 않게 차분한 분위기입니다. 그건 쉬지 않고 내리는 눈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리는 이 눈 속에 1만8,000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고, 900여 명의 교민이 있습니다.
제가 이 나라를 찾아온 것은 고려인에게 '문학 봉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문학 봉사는 제가 만들어 본 말입니다. 지난 2년간 대학에서 문학을 배운 '청년작가아카데미' 학생들과 함께 고려인에게 고전문학 작품을 읽어 드리고 한국어 붐이 일고 있는 여기 대학생들에게 한국의 문학 작품을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봉사를 위해서 먼 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와 달리 짧은 겨울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된 여기 대학생들이 생활 용어 중심의 한국어가 아닌 한국의 시와 소설을 만나 반짝이는 눈빛을 보여줘 반가웠습니다.
키르기스스탄은 옛 영웅 '마나스' 장군을 기리는 대서사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문자인 키르기스 어로 만든 책도 있지만, 이 서사시는 10시간 넘게 구술되고 있는 것이 전통이니 시를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어제는 여기 한국어교육원에서 고려인과 교민들을 위한 '고향의 봄 문학의 밤'을 가졌습니다. 요란한 행사가 아니라 이원수 선생의 동시를 고려인과 우리 대학생이 함께 읽고, 노래로 만들어진 동요를 불러보는 행사였습니다.
그치지 않는 눈과 혹한 때문에 손님들이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으나 김루드밀라, 이올가, 베르벳, 엘비라, 나율라, 허리따… 50여 명이 속속 모였습니다. 고려인들은 서툴지만 이원수 선생의 동시를 읽고 동요들을 불렀습니다. 모르는 글자는 학생들에게 물어 가며 읽어 갔습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선생의 '겨울나무'를 동요로 부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고려인이 많아졌습니다. 그건 이 설국에서 자작나무처럼 외로이 서서 혹독하게 견뎌온 지난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분하게 시작된 문학의 밤은 아아, 결국은 눈물바다로 끝이 났습니다. 참석자 모두 손을 잡고 '고향의 봄'을 부르며 따뜻하게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도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고향의 봄'이 왜 '한민족의 애국가'인지 키르기스스탄에 와서 알았습니다.
중앙아시아 어디에서든 이런 눈물은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저희가 가진 문학의 밤은 키르기스스탄 고려인에게는 1991년 독립이 된 지 20년 만에 처음 있는 문학 행사였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이스베틀라나 할머니는 "왜 진작 찾아오지 않았나"며 저희들을 나무랐습니다. 정민규 교육원장도 눈물을 훔치며 한 번 더 다녀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한글이 아닌, 한글이 전해 주는 문화의 울림을 갈망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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