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드라마 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KBS '아모레미오'를 들겠다. 가짜 대학생 노릇을 하는 공장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 드라마는 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을 배경으로 엄혹했던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개인의 삶을 진정성 있게 그렸다.
무엇보다 최근 브라운관을 점령한 '실장님' '본부장님'들이 인도하는 판타스틱한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진지한 고민과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가 반가웠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벌어진 정권의 녹화사업과 대학생 프락치를 소재로 했지만 거창한 구호에 질식되지 않았고, 뻔하디 뻔한 사랑을 밑바닥 출신 청년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로 새로 보이게 했다.
연출자인 김영조 PD는 "양아치였던 한 남자가 사랑 때문에 가짜 대학생이 되고 프락치 누명을 쓰는 등 비극을 겪지만, 그로 인해 인생이 변하고 또 피가 섞이지 않은 딸을 키우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80년대 초반 운동권과 무관했던 김 PD의 형이 유치장에 갇혔던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촌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80년대 이야기는 흘러간 유행가처럼 구태의연할 수 있지만, 결혼을 앞둔 딸이 숨겨온 아빠의 과거를 추적한다는 콘셉트와 추리극 형식을 빌려 젊은 세대까지 껴안았다. 이선희 작가의 필력과 정웅인 등의 농익은 연기는 짜임새 있는 구성과 빠른 전개를 타고 4부작에 담기 벅찬 내용들을 무리없이 풀어 놓았다.
모든 촬영은 단 25일에 마쳤다. 회당 6일 남짓으로 매우 빡빡한 일정. 넉넉지 않은 제작비 사정을 감안해 작가와 출연자들은 원고료와 출연료를 자진 삭감했다. 이렇게 뜻을 모은 데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드라마를 찍는다는 사명감도 한몫 했을 터. 로맨틱코미디나 팩션 사극의 열풍 속에 시대극은 제작 시도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공화국이라지만 비슷비슷한 드라마만 양산되고 있다. 제작규모가 커지고 출연료가 치솟았지만 제작비는 여전히 부족한 탓이다. 때문에 PPL(간접광고)이 가능하거나 사극처럼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오는 작품만 각광받는다. 한류 열풍에 따라 해외수출을 겨냥한 작품들만 기획해 엇비슷한 소재와 주제에 머무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드라마는 가장 좋은 오락거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재벌이 안 나오면 드라마가 안 된다. '한지붕 세가족' '서울뚝배기' '서울의 달' 같은 서민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가 사라졌다. 화려한 백일몽으로 고단한 현실을 잊는 것도 좋으나 이제는 땅에 발붙인 사람들의 얘기를 보고 싶다. 방송사 편성에 좌우되는 드라마는, 영화처럼 독립 제작자들의 새로운 실험을 기대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드라마가 나오려면 방송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막극 부활을 내걸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KBS '드라마스페셜'의 의미있는 도전을 응원한다.
채지은 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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