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만해도 재벌 빵집의 관심 포인트는 분명 이게 아니었다. 재벌가의 딸들이 벌이는 경쟁 그 자체가 흥미거리였다. 삼성 이부진, 현대차 정성이, 롯데 장선윤, 신세계 정유경, 이들 국내 굴지의 재벌 2ㆍ3세 여성들이 잇따라 고급 베이커리 사업에 뛰어들면서 세간의 이목은 당연히 속칭 '공주'들의 대결구도에 쏠리게 됐다. 재벌가 여성들은 기왕에 명품샵이나 면세점 쪽에서도 승부를 벌이고 있던 터라, 베이커리 싸움은 타블로이드식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재벌보다 그 딸들에 방점이 찍힌 건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똑 같은 재벌 2세라도 아들들에 대해선 주로 경영능력을 거론하는데 비해, 딸들은 럭셔리한 패션이나 취미 혹은 배우자 등을 먼저 얘기하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과연 아들들의 경쟁이었다 해도 이런 시선을 받았을까 싶기도 하다.
인터넷과 SNS가 공론을 주도하는 요즘, 더구나 선거를 앞둔 정치의 계절엔 어떤 방향이든 분위기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다분히 흥미롭게만 바라봤던 재벌 딸들의 빵집이 탐욕의 상징이자 나쁜 세습 자본주의의 전형으로 매를 맞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反)재벌정서의 확산 속에 '재벌이 빵집까지 운영한다→빵집은 대표적 동네점포다→따라서 재벌이 동네상권을 죽인다'는 삼단논법이 만들어졌고, 이는 재벌에 대한 거부정서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결국 대통령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됐고, 삼성 현대차 마침내 롯데까지 베이커리 사업을 접기에 이르렀다.
'반도체 자동차를 만드는 글로벌 기업이 쪼잔하게 빵까지 만들어야 하나'는 지적은 크게 틀리지 않다. 사실 우리나라 재벌은 뭐든 다 하려고 하는 게 큰 문제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 베이커리들이 정말로 동네 빵집을 고사시켰는지, 또 딸들의 개인 사업이었는지 아니면 회사의 관련 비즈니스였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전국 통틀어 27개뿐이고 상당수는 빌딩 안에 들어가 있는 삼성의 아띠제, 제주도 계열 호텔과 본사 딱 두 군데뿐인 현대차의 오젠, 백화점에만 7개 입점해있는 롯데 포숑을 모두 폐점하면 과연 골목상권과 소상공인에게 뭐가 달라지게 되는지도 꼭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재벌 빵집의 개점부터 철수까지 과정을 반추해보면 코미디 같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정서에만 의지한 채 본질은 비껴가고 있는 재벌개혁논의의 현 주소일 수도 있겠다.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를 부활시키려는 것도 같은 식이다. 사실 출총제가 폐지된 건 MB정부 들어서지만, 훨씬 이전부터 식물상태나 다름 없었다. 출총제란 본디 원칙대로 운용하면 기업들의 정상적 투자까지 가로막게 되고, 반대로 하나 둘씩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하면 있으나마나 한 제도가 된다. 출총제를 다시 살려내도 똑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경제가 어려워지거나 정권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결국 누더기 제도가 되면서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게 뻔하다.
재벌개혁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재벌의 무엇을 개혁할 것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문어발 확장과 중소ㆍ소상공인 침해가 문제라면, 일감 몰아주기의 폐해가 막대하다면, 이젠 좀 새롭게 접근하고 새로운 규제방법을 찾아야 한다. 몇 개 되지도 않는 빵집 없애고, 순대와 청국장 못 만들게 하고, 효력이 이미 검증된 출총제 같은 '올드 카드'나 다시 꺼내는 식으론 아무 것도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재벌개혁이 성공하려면 절대로 대기업을 흔들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이건 경험이고 사실이다. 대기업들의 투자ㆍ고용의욕을 꺾으면 경제 전체가 흔들리고 그 순간 개혁이고 뭐고 끝나버리고 만다. 예컨대 총수는 규제해도 기업은 규제하지 말고, 오너는 세금을 더 물려도 기업은 세부담을 늘려선 안 된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부자증세 바람도 어디까지나 개인(소득세) 얘기지, 기업(법인세)을 겨냥한 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성철 산업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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