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성은 그의 생명이다. 제도권 밖에서 제도권의 가장 중심부까지,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는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극단 현장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다.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신임 사장이 그려온 드나듦의 여정은 무대보다 극적이다. 공무원이 파견된 '서울시사업소'였다가 재단법인으로 거듭난 세종문화회관의 변신을 무색케 한다.
서울대 물리학과(72학번) 학생 시절 그는 도서관 책벌레였다. 첫 변신은 2학년 때 연극반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김지하, 임진택 등 쟁쟁한 선배들과 만나고 배우로 활동하다 4학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ㆍ제적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어 학원 강사와 룸펜 사이를 오가던 그는 극단 연우무대에서 조연출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다.
1984년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의 가사를 바꿔 당시 정부를 비꼬았다. 이를테면 패러디였고, 연우무대의 장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심사 대본과 다르다며 시비가 들어와 6개월 공연 정지를 당한 것은 물론 극단 내 극렬 분자를 솎아내라는 당국의 압력에 밀려 그는 또 거리로 나가야 했다. 당시 빌미를 주었던 게 한국일보였다. 평론가가 쓴 리뷰에서 개사된 내용을 옮겼던 것. 결국 수감된 그는 1986년 졸업장을 받게 됐고 한국일보는 '철창 속 14년 만의 졸업장'이란 기사로 알렸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민중 문화 운동가로 활동했다. "민청련의 기획실장으로 문화 운동을 장르별로 배치하는 일이었죠." 풍물패, 독립영화패, 미술패 등 당시 10여년간 한국 사회 풍경을 규정했던 민중 문화판의 얼개가 그의 머리를 거친 것. 1993년 문민정부 때 민예총이 법인화되면서 '저항에서 대안으로'로 노선이 바뀌었고, 그는 보다 넓게 문화 현상을 바라보았다.
DJ는 그의 경계 넘기에서 독특한 여운으로 남아 있다. "1988년 신촌 한마당극장에서 내 무대를 보러 온 DJ가 구체적 의견을 제시해 관련을 맺을 뻔 했어요. DJ는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난 식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인해 모두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2006년부터는 안산시 산하 안산남사당풍물단 예술감독을 3년 하고는 극단 현장으로 돌아왔다. 2009년 MBC 마당놀이를 연출하며, 서울시교육청과 성남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기획 사업을 하던 중 세종문화회관에서 제의가 온 것이다.
"이제 '좌냐 우냐'의 질문 방식은 너무 근대적이에요. 문제는 삶의 방식을 어떻게 향상시키느냐에 있죠." 그래서 팝페라, 뮤지컬 등 경계를 초월한 새로운 현장성을 발전ㆍ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상전벽해가 돼 버린 세상이지만 자신이 만든 극단의 초심은 더욱 절실해졌다는 다짐처럼도 들린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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