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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스트레스의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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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스트레스의 아버지'의 추악한 과거

입력
2012.01.3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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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10월 보건복지부와 국립암센터는 금연, 절주, 적절한 운동과 예방접종 등 열 가지 항목을 묶어 '국민 암예방수칙'을 발표하였다. 당시 국립암센터에 근무하던 필자는 관련 소식이 실린 뉴스를 검색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기사마다 '스트레스가 왜 빠졌느냐'는 항의와 조롱이 담긴 댓글이 다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전문가 회의를 통해 스트레스를 발암물질로 관리할만한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지만, 비전문가의 상식과는 커다란 괴리가 있음을 확인한 사례였다.

스트레스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190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태어나 프라하 대학에서 의학과 화학을 전공하고 1930년대 미국으로 건너온 한스 셀리에가 동물 실험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일반 적응 증후군으로 이론화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셀리에는 국제 스트레스 연구소를 세우고, 1700여 편의 논문과 39권의 책을 썼으며, 노벨상 후보로 10번이나 오르는 등 탁월한 연구 업적을 남긴 결과 1982년 사망할 당시 "스트레스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한편 2011년 '미국 공중보건학회지' 3월호에는 런던위생열대의학대학원 소속 두 명의 저자가 쓴 흥미로운 논문 한 편이 실렸는데,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담배회사 내부 문서 중 594개를 검토하여 셀리에와 담배 회사가 생전 부적절한 유착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폭로하였다(Petticrew MP and Lee K. Am J Public Health 2011;101(3):411-418 http://goo.gl/5sIlU) 논문에 따르면, 셀리에는 담배 회사에 먼저 연구비를 요청했고, 이후로 담배 회사로부터 많은 연구비를 받아 스트레스와 건강 영향 연구를 수행했으며, 캐나다 의회에 출석해 담배의 건강 영향을 부정하는 증언과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논문에는 셀리에가 한 발언으로 "담배의 이득에 대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일은 경악할 만하다. (중략) 나는 선량한 계몽의 십자군과 무수한 건강염려증 환자가 만들어낸 피해가 더 클 것임을 확신한다"는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셀리에의 스트레스 연구 결과를 담배회사는 크게 반겨 담배와 심혈관질환 발생의 관련성 논쟁에서 스트레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였고, 근간에는 간접흡연의 발암 위험 효과를 반박하는 근거로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셀리에의 전문가적 견해는 이미 밝혀진 흡연의 위험을 희석시켰고, 셀리에 자신 또한 담배 회사에 고용된 변호사에 이용당함으로써 과학적 독립성을 잃었으며, 담배 회사가 과학적 과정을 조작하는데 일조한 셈이었다.

담배 회사가 담배의 해악을 감추기 위해 스트레스만 이용한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된 '청부과학'이나 '의혹을 팝니다'를 살펴보면 담배 회사가 업계에 유리한 데이터만 골라내고 해명되지 않거나 변칙적인 세부 사항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으로 다양한 위험 요인에 대해 불합리한 의심을 만들어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2007년 굴지의 대학병원에서 다국적 담배 회사의 용역을 받아 담배의 유해성 평가를 위한 임상시험을 수행하려다 언론에 알려져 승인이 취소된 사건이 있었는데(<한겨레> 2007년 7월 5일 자: http://goo.gl/JoxvM),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를 딛고 세워진 그 대학병원 임상연구소 로비 벽면의 기부자 명단에 담배 회사의 이름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는 사실과 연계하여 생각해보면 우연한 스캔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설문조사나 담배 판매량 통계를 보면 연초 일시적으로 금연 시도가 늘고 담배 판매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금연 실패의 변명으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담배를 다시 피우겠다고 말한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경제는 어려워지는 등 스트레스 쌓일 일이 더욱 많지만 담배를 사기 위해 가뜩이나 얇은 지갑을 열지 말자. 담배 회사가 심어놓은 망상에 굴복하여 담배를 피우는 일은 건강도 망치고 통장도 비는 무한 스트레스에 올라타는 셈이다.

황승식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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