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매장·학원·문구점… 우리가 모르는 새 골목까지 들어와
'프로스펙스' 브랜드로 알려진 LS네트웍스는 지난 2010년 4월 서울 잠원동에 자전거전문 대형매장 '바이클로'를 개장했다. 국내외 30여개 자전거 브랜드를 취급하고 자전거 마니아들이 쉴 수 있는 라운지와 샤워 시설까지 갖춘 이 매장은 오픈 1년 만에 대리점이 10여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동네 자전거소매상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인보식 강남스포츠 대표는 "계열사가 20개가 넘고 자산이 10조원에 육박하는 재벌그룹(LS그룹)이 자전거까지 팔면서 30년 이상 형성해 온 소매상권을 잠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벌 딸들의 빵집'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는 다른 업종에서도 공방이 확산될 조짐이다. 재벌들이 진출해있는 업종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재벌이 꼭 이런 사업까지 해야 하나"는 비판여론은 점점 더 고조되는 분위기다.
재벌그룹이 가장 몰려 있는 곳은 외식업이다. 범LG가에 속하는 외식전문업체 아워홈은 2001년 돈가스 전문점 '사보텐'을 개점한 데 이어 2010년 말엔 '밥이답이'를 오픈해 비빔밥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LG패션도 자회사 엘에프푸드를 통해 카레집 '하코야씨푸드' 사업을 하고 있다. CJ계열 CJ푸드빌은 2010년 비빔밥 전문점 '비비고'를 오픈하고 국내 7곳에 점포를 열었고, 차이니스 레스토랑 사업에도 진출해 있다. 애경그룹은 일본 치카라노모토사와 제휴해 일본 라면점 '잇푸도'를 운영하고 있고, 농심은 일본에서 카레식당 브랜드 '코코이찌방야'를 들여왔다.
매일유업과 남양유업도 인도식당 '달', 이탈리아 식당 '일치프리아니'에 뛰어들었다. 업계 관계자는 "연예인이 운영하는 사업인데 알고 보니 대기업 자본이 들어와 있는 경우도 있다"며 "외식업의 경우 재벌가의 친인척 등이 개인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아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학원 약국 주유소 문구점 등 '골목'상점들이 공략대상이 되고 있다. 웅진그릅의 웅진씽크빅은 기존의 학습지와 연계된 형태의 '씽크센터'라는 학원을 오픈해 점포수를 급격히 확대하고 있다. 드럭스토어 형태인 CJ그룹의 '올리브영'이나 GS리테일의 '왓슨스'는 현재 매장 내에 약국을 입점시킬 수 있다. 현재는 숫자가 많지 않지만 일반의약품 슈퍼 판매가 허용될 경우 약국 사업 진출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대형마트들이 주유소 사업에 뛰어들거나 문구 제조사 모나미의 문구점 사업을 시작한 것도 기존 상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대기업들의 '먹성'이 서민 업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특히 명품 브랜드 수입이나 수입차 매장 등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제일모직은 2008년부터 해외 명품 브랜드 수입업을 시작했고, 신세계는 조르조 아르마니, 코치, 돌체앤가바나 등을 들여와 팔고 있다.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아들 장재영씨는 폴 스미스 등 외국 제품을 수입하는 비엔에프통상을 운영한다.
재벌가 아들들의 경우 수입차 사업에 관심이 많은 것도 특징.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이 이사로 있는 DFMS(옛 두산모터스)는 혼다 재규어 랜드로버 등을 수입해 판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아들들은 벤츠 딜러인 더클래스효성, 도요타 딜러인 효성토요타의 지분을 각각 3.48%와 20%씩 보유 중이다. 이밖에 GS그룹에도 수입차 딜러 계열사가 있다.
전문가들은 재벌, 그 중에서도 2ㆍ3세들이 주도하는 사업이 서비스업에 집중되는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 세대가 이끌었던 제조업이 '레드 오션'이 됐다고 판단, 2ㆍ3세들은 초기투자비 부담이 크지 않고 계열사 지원에 기대어 높은 수익을 올리는 서비스업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본업과 관련된 업종에 진출해 수직계열화를 이룬다면 문제 삼을 게 없겠지만 그룹의 지원을 받아 편안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수입ㆍ서비스업에 집중한다는 건 분명 기업가 정신의 실종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재벌그룹이 2대, 3대로 내려오면서 친인척의 수가 많아지고 있는 점도 확장의 배경으로 꼽는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아들딸, 손자손녀까지 합치면 재벌가의 구성원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들에게도 먹고 살 거리를 해결해줘야 하다 보니 식당, 수입차 딜러, 해외브랜드수입 등 본업과 무관한 업종까지 손을 대게 되는 현실적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 "빵집 다음엔 뭘 내놓나" 재계 눈치만
"반재벌정서가 지금처럼 강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1년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한 대그룹 고위임원은 '재벌 딸들의 빵집' 논란이 불거지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경제력 집중이나 부의 승계 같은 제도적 문제가 아닌 '빵집' '떡볶이'같은 국민들의 가장 민감한 정서를 자극하는 소재들이 부각되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이를 비난하고 나서자 재벌그룹들은 더욱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재계는 특히 올해 두 차례의 선거를 치르면서 이런 반재벌정서가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한 재계 고위관계자는 "원래 반재벌성향이 강했던 야당은 그렇다 해도 여당, 심지어 청와대까지 대기업을 몰아붙이는 건 역대 어느 정권, 어느 선거에서도 없었던 일"이라며 "향후 선거는 친기업 대 반기업의 대결이 아니라 누가 더 반재벌이냐의 경쟁구도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각 그룹들은 정치권과 여론동향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과거 선거 때는 보다 기업친화적인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공언도 했고 나름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이젠 재계의 의견을 취합하고 전달하는 게 무의미한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모 그룹 관계자는 "빵집까지 내놓았으니 다음은 뭘 내놓아야 정치권과 여론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일부 그룹에선 실제로 서민업종과 관련해 정리 가능한 사업들을 취합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재계는 현재 전개되는 대기업에 대한 공세가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재벌에 대한 공격이 거의 마녀사냥 수준"이란 불만까지 제기되고 있다. '재벌 딸들의 빵집' 논란에 휩싸여 삼성 측이 접기로 한 신라호텔의 커피ㆍ베이커리 전문점 아티제만 해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녀 이부진 사장은 신라호텔의 대표일 뿐 아티제에 대해 개인지분을 전혀 갖지 않고 있고 ▦대부분 매장이 사옥과 오피스 빌딩에 입주해있어 골목상권과는 무관한데다 ▦제품의 가격대도 높아 동네 빵집과는 경합관계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일단 반서민으로 낙인 찍히면 꼼짝없이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며 "선거가 본격화될수록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 현대차도 구내 카페 사업 손 뗀다
삼성 계열 신라호텔에 이어 현대차그룹도 베이커리 카페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은 27일 계열사인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가 서울 양재동 본사와 제주 해비치호텔 등 2곳에서 운영 중인 카페'오젠'을 접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젠은 정몽구 회장의 맏딸인 정성이씨가 고문으로 있는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의 사업부가 운영해 왔다.
현대차그룹은 "오젠은 사원 복지 차원에서 김밥, 샌드위치, 커피 등을 판매하는 사내 매점 성격의 편의시설로 대기업의 무차별 영역 확장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입장이지만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사업철수를 결정했다고 전했다.
회사 관계자는 "사옥 매점은 본사 직영의 비영리 직원 휴게 공간으로, 제주 해비치호텔 영업장은 고객라운지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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