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에 대한 테러 행위가 난무하고 있다. 최근 영화 '부러진 화살'로 논란을 낳고 있는 석궁 테러,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 벌금형을 선고하고 석방한 판사에게 "화성인 판결"이라고 비아냥거린 검찰의 언어 테러, 보수단체라는 사람들이 이 판사가 사는 아파트로 몰려가 유리창에 날계란을 던진 달걀 테러까지. 지난달에는 대법원이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에게 징역1년의 실형 확정 판결을 내리자 인터넷과 SNS 공간에서 대법관들에 대한 신상털기 테러가 횡행하기도 했다.
수단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폭력적으로 상대방을 위협해 공포에 빠뜨리려는 행위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해당 판사들이 이런 행위를 맞닥뜨리고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사실 쉽게 예상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할 뿐"이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판사 개개인의 독립적인 판결은 곧 법원, 사법부의 의사라는 점에서 최근 일련의 사태는 우리사회의 사법불신이 얼마나 깊고 넓게 치닫고 있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증표로 보인다.
테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병주의 소설 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해방공간의 테러리스트 로푸심이 생각난다. 중국계 한국인으로 등장하는 그의 이름 로푸심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테러리스트 보리스 사빈코프가 썼던 필명 로프신을 음차한 것이다. 사빈코프는 전설적인 테러리스트였다. 자서전 격인 이라는 책에서 그는 테러를 이런 표현으로 정의했다고 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는 법이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불의한 죽음의 세계라고 느낄 때 법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테러가 싹트고 테러리스트가 나타난다, 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지금 한국 상황에 비추면 "불신이 지배하는 곳에는 법이 없다"는 말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법불신은 곽노현 교육감 재판 담당 판사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인 공교육살리기국민연합이라는 단체 회원들이 들고 있던 현수막 글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법치 파괴 판사, 동네 법으로 처벌합시다." 판사의 재판 결과를 오히려 '법치 파괴'로 규정하고, 사법부의 판결이 아니라 '동네 법'으로 정의를 바로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왜 이렇게 우리사회에서 사법에 대한 불신이 커졌을까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뿌리는 깊다. 석궁 테러 사건을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의 파장이 커지자 법원은 공개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 영화가 '사법테러'를 미화한다며 비판하고 나섰지만, 사실 사법테러라는 용어는 '사법살인'처럼 과거 사법부의 그릇된 정치적 판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거꾸로 '사법부에 대한 테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과거사 사건에 대한 재심들은 권력의 시녀라는 표현을 쓸 것도 없이 우리 사법부의 부끄러운 과거를 말해주는 증거다. 그 과거는 사법부에 족쇄다.
최근 인터넷과 SNS를 통해 판사들이 개인적인 사사로운 의견을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현상이 판사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판결문으로 이야기할 뿐이라던 판사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장삼이사나 마찬가지로 마치 낙서 같은 글 한 줄 올리고 그것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판사의 권위를 믿지 않게 됐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보수니 진보니로 찢어진 우리사회에 있다. 이른바 진보세력은 보수적 판결에 대해 악을 쓰고 나서고, 소위 보수세력은 진보적 판결에 대해 죽자고 덤비고 든다. 결국 내 입맛대로 판결을 재단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정봉주, 곽노현 판결을 놓고 벌어진 테러는 바로 이것이 본질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철저히 불신하고 있으니 사법부라고 그 불신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양심수"라는 말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한때 '떼법'이라는 말이 유행이었지만 이제는 '동네법'이 그걸 대치하지 않을까 싶은 상황이다.
입만 열면 법치를 내세우며 국민의 저항을 눌렀던 권위주의 시대, 그때 권력의 위장막으로 쓰였던 법치주의라는 말에 신물이 났던 기억이 있다. 이제 다른 의미로 법치주의의 위기가 오고 있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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