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젊은 문학인들의 미학적 실험에 대한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꼽으라면 한국일보문학상을 빼놓을 수 없다. 멀리 갈 필요 없이 2009년과 2010년의 수상자 한유주(30)씨와 황정은(36)씨를 거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독특한 문체와 진중한 문제의식으로 2010년대 한국 소설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는 이들이 나란히 새 소설집을 냈다. 편집증 환자의 수다를 방불케 하는 독백식 질문이 꼬리를 무는 한씨의 작품과 간결하고 함축적인 언어가 특장인 황씨의 작품 스타일은 극히 상반되지만, 이 시대 문학의 의미를 집요하게 묻는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한유주 '나의 왼손은 왕… ', 나는 무엇으로 쓰는가… 끊임없는 회의로 질문 던져
한씨의 세번째 소설집 <나의 왼손은 왕, 오른 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발행)는 무척 불친절한 소설이다. 수록된 9편의 단편엔 하나 같이 손에 잡히는 뚜렷한 서사가 없다. 이야기가 겨우 진행될 만하면 곧바로 이를 부정하는 진술이 꼬리를 물고, 의식의 단절을 보여주는 쉼표도 쉼 없이 출몰한다.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며 질문하고 뒤집는 방식이다. 잘 포장된 한 편의 드라마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질색할 법하지만, 이야기의 탄생 과정에 관심이 있다면 이 어지럼증을 견딜 만하다. 나의>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모든 이야기는 결국 베끼기가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화자는 아예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라는 단편을 빼 닮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이를 베끼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라는 단편에선 베끼기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베끼지 않고 무언가를 쓸 수는 없어, 적어도 나는 누군가의 말을 따라하며 언어를 익혔어, 누군가의 문장을 흉내내며 글쓰기를 익혔지, 내가 말했다. 그런 면에서 언어는 진화하지 않고 문학은 진보하지 않아. 베끼는 것만이 가능하지."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현대의 작가들이 핵심적으로 부딪쳐온 문제다.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무제한적으로 확장돼 있지만 이야기의 토양인 현대인의 삶은 제한적이고 무미건조하며,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눈 딱 감고 이리저리 떠도는 이야기를 얼기설기 엮어도 좋으련만, 자의식 강한 작가는 황량한 폐허에서 도대체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쓰고 싶다는 욕망 혹은 욕구, 혹은 희망마저도 온전히 내 것인지 알 수가 없다."('농담' 중)
이런 식의 회의적 질문은 '세상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다'는 염세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등의 단편의 시간적 배경은 30억의 인류가 한꺼번에 익사한 대재난 이후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더 이상 놀라운 일도 없는 종말의 시간대로 "그저 다 우스운 일들일 뿐인" 세계다. 작가는 지금이 바로 그런 종말의 시대가 아니냐는 질문을 매섭게 던지는 셈이다.
황정은 '파씨의 입문', 사라지고 잊혀진 존재들… 그들에 대한 따뜻한 목소리
한씨가 이야기를 만들고 글을 쓰는 주체를 집요하게 추궁한다면, 황정은씨의 두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 (창비 발행)은 사라지고 잊혀지는 타자의 세계를 더듬는 이야기다. 2010년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으로 "고도의 윤리성을 바탕으로 새롭고도 완성도 높은 소설 미학을 구축했다"(심사평)는 호평을 받은 첫 장편 <백의 그림자> 가 다룬 이야기가 재개발 지역 철거민이다. 2009년 용산참사 이후 철거민은 작가의 사회 정치적 관심을 드러내는 뜨거운 소재다. 이번 소설집은 작가의 그 관심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백의> 파씨의>
소설집 전체에서 작가가 끄집어내는 것은 억눌린 혼령의 목소리들이다. 작가는 영매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소리를 되살려 놓는데, 귀기 어린 환상성과 어울려 돋보인다. '대니 드 비토'에선 사랑하는 이의 몸에 들러 붙은 원령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야행'에선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풍비박산이 난 부부의 서러운 이야기를 풀어놓고 '낙하하다'는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하염없이 낙하하는 이의 독백을 담담하게 전한다.
보잘것없는 항아리를 주운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옹기전'은 황씨가 추구하는 작가의 위상이 잘 드러난다. 재수 없으니 항아리를 내다버리라는 부모의 호통에도 항아리를 집에 숨겨 놓는 아이는 '서쪽에 다섯 개가 있다'는 항아리의 소리를 듣고 정처 없이 길을 나선다. '항아리만 보고 있다가는 사람이 못 쓰게 된다'는 노인과 항아리를 구덩이 속에 파묻는 데 몰두하는 인부들을 만나는 와중에서 아이는, 그러니까 사라지는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작가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일일 바자회에서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생의 하루를 그린 '양산 펴기' 등은 환상성을 배제하고 현실에 밀착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작가의 이런 관심에 든든한 믿음을 더해 주는 것이 그의 문장이다. 별다른 수식이 없이 간결하고 담백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절묘한 리듬으로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이 황정은 문장의 매력이다. 간신히 존재하는 이들의 소리를 사려 깊게 들을 줄 아는 자만이 낼 수 있는 리듬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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