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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안동 천등산 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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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안동 천등산 봉정사

입력
2012.01.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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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산사… 무진장의 침묵 속에 머물다

눈 덮인 산사는 풍경이 아닌 심경(心景)을 향해 난 길 끝에 서 있었다.

경북 안동시 천등산 봉정사. 감로수 흐르던 돌확 속에 하늘이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바람은 푸르고 처마에 달린 놋종 소리는 찼다. 죽은 나무도 겨울엔 더 굳어지는지 법당 지게문 열리는 소리가 우악스럽다. 헌향 삼배(獻香 三拜)하고 나니 무진장의 침묵이 쏟아진다. 산 속의 겨울 해는 짧다. 개울 건너 입 구(口)자 모양의 영산암. 거기 어금니 같은 방 한 칸을 얻어 누웠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에서 노장스님 혜곡이 문을 열고 동자승 혜진을 부르던 방이다. 압밀한 침묵이 곧 방을 삼켰다.

몇 번 다녀온 봉정사를 한겨울에 다시 찾아가게 만든 건, 책방에서 우연히 집은 다치하라 마사키(入原正秋)의 자전적 소설 이다. 다치하라(한국명 김윤규)는 봉정사(책엔 무량사로 나온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승려였던 그의 아버지는 다치하라가 여섯 살 때 이 절에서 자진했다. 다치하라는 "아버지의 짧은 생애는 무상감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햇살은 퍼져 있는데 몹시 추운 날이었다. 나는 하얀 바람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보았다"고 썼다. 여기쯤 읽다 잠이 든 것 같다.

새벽 세 시. 잠과 각성의 혼미한 틈으로 도량석이 파고든다. 딱,딱,딱. 속이 찬 나무로 속을 비운 나무를 때리는 소리가 청량했다. 파카 위에 누빈 승복을 껴입고 털고무신에 발을 넣었다. '쩡'하고 발끝에 닿는 한기.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남은 잠이 달아난다. 우화루를 통과해 법당으로 가는 마당에 서자, 다시 '쩡'하는 풍경이 남쪽 하늘에 걸려 있다. 음력 스무이틀의 하현. 삭도 같은 달이 서풍을 받아 흐르는 구름을 짐승의 털 밀듯 잘라낸다. 흰 달빛에 소멸되는 구름의 흰 빛. 어둠과 밝음의 경계가 보이는가….

장장장장장. 넋 놓고 하늘을 향해 선 몸뚱이에 운판 두들기는 소리가 스며들었다. 바람에 몸이 떨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단속적으로 어둠을 지워냈다. 열린 법당 문틈으로 누런 빛의 부처가 중품하생(中品下生)의 둥근 손가락을 내보였다. 그 손짓의 경계가 짐작되지 않아 막막했다. 부처의 곱은 손가락을 향해 고무신을 끌었다.

■ 겨울이 좋은 산사들

▦지리산 법계사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자리한 절이다. 천왕봉의 턱밑, 천왕샘과 로타리 산장 사이에 있다.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라 불상이 없다. 대신 사리를 봉안한 자그하만 삼층석탑이 눈 덮인 산맥을 굽어보고 서 있다. 지리산 전체를 가람 삼아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사이 일주문처럼 서 있는 절이다. ●천왕봉에 오르는 최단 코스인 중산리 등산로를 이용하면 된다. 매표소에서 절까지 7㎞ 정도 된다. (055)973-1450.

▦비슬산 유가사

대도시 대구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한적한 겨울 산사의 풍경. 이곳에선 풍성한 전설과 시정(詩情)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를 쓴 일연이 젊은 시절 20여년 머문 곳이라 이 산에 깃든 천년 묵은 이야기들이 책 속에 남아 숨쉬고 있다. 비석과 바위에 쌓인 눈을 닦으면 거기 옛 시들이 음각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 현풍IC에서부터 이정표가 서 있다. 대구서부버스터미널에서 버스가 다닌다. (053)614-5115.

▦가지산 보림사

나지막한 장흥 땅, 흰 눈을 뒤집어 쓴 비자나무숲에 보림사가 묻혀 있다. 이 절 자랑인 동백은 아직 꽃봉오리를 맺지 않았지만, 비자나무 숲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멀리서 찾아간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당우도 탑도 모두 소박한 모습인데 의외로 국보와 보물이 많다. ●광주에서 영암 방면으로 난 23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보면 장흥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이정표가 보인다. (061)864-2055.

▦천등산 봉정사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극락전)로 유명한 절이지만, 막상 가보면 그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오래된 건물들이 서로를 배경 삼아 어울린 아늑한 분위기가 진짜 매력. 동편에 있는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등의 영화가 촬영된 곳이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멀지 않다. 가는 길에 여러 채의 조선 고택이 있다. 제비원석불로 알려진 이천동 마애불도 가깝다. (054)853-4181.

▦동리산 태안사

전남 곡성 땅에 있는 조용한 절이다. 계곡을 따라 난 비포장 숲길을 걸杵?한다. 가는 길에 다리가 많은데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다양한 수종의 아름드리 나무와 대나무밭, 눈 덮인 승탑, 검박한 절간의 살림이 섞여 따듯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호남고속도로 석곡IC에서 나와 압록 방향으로 10㎞ 가량 직진. 거기서 원달 방향으로 6㎞ 정도 더 가야 한다. (061)363-4441.

▦고령산 보광사

일주문 넘어서면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의 눈 밟는 소리와 두터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청정한 계곡 소리로 귀가 즐거워지는 절이다. 만세루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눈이 호사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도 등장하는 고색창연한 옛 벽화와 민중미술의 필치로 그린 새 벽화가 독특한 어울림을 보여준다. 멋들어진 목어는 이외수 산문집 표지에 실린 그것. ●경기 고양시 벽제에서 파주시 광탄면 쪽으로 가는 고갯길(367번 지방도) 넘으면 있다. 서울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가 다닌다. (031)948-7700.

▦상왕산 개심사

충남 서산 내포 땅, 500m 가량 되는 돌계단 오솔길을 오르면 마음 열리는(開心) 절집이 나온다. 굽은 원목을 그대로 사용해 멋들어지게 휜 심검당과 범종각의 기둥이, 마치 눈의 무게를 버티느라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미음(ㅁ)자로 닫힌 구조의 절집이라 한겨울에도 포근한 느낌을 준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에서 647번 지방도를 타야 한다. 절 입구까지 시멘트길이 깔려 있지만, 지나쳐 버리기엔 돌계단길이 너무 곱다. (041)688-2256.

▦한라산 관음사

한라산 중턱(해발 650m)에 있다. 규모 있는 고찰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배경이 되는 흙붉은오름과 사라오름이 경칩 지날 때까지 순백의 눈옷을 벗지 않는다. 그 모습이 절 입구에 양쪽으로 도열한 불보살상과 함께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곶자왈 깊은 숲도 이 절을 찾는 즐거움이다. ●제주시에서 1131번 지방도나 516도로를 타고 서귀포 방향으로 가다가 산천당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된다. (064)756-2202.

▦삼각산 경국사

시내버스가 닿는 서울 시내의 절이지만, 정류장 옆 개울 건너 일주문에서 경내까지는 제법 호젓함이 감도는 길이다. 주위를 끼고 도는 북한산 둘레길이 생겨 산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조선 말 지어진 묵은 당우들이 남아 있다. 가까운 곳에서 산사의 겨울 정취를 느끼고픈 사람에게 반가운 절. ●국민대학교 뒤편 정릉계곡 가는 길에 있다. 162번, 1020, 1113번 버스가 닿는다. (02)914-2828.

안동=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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