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하철도 999의 출발역… 시간조차도 느릿느릿
엄마가 보고싶은 소년 데츠로(한국 이름 철이)가 비밀을 간직한 여인 메텔과 함께 기차를 타고 광활한 우주를 여행한다는 ‘은하철도 999’의 발상은 일본 소설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ㆍ1896~1933)의 소설 ‘은하철도의 밤’에서 출발했다. 하늘뿐 아니라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4차원행 열차가 등장하는 ‘은하철도의 밤’이 영감의 원천이었으니, 그 열차의 출발지를 굳이 꼽자면 바로 이곳일 게다. 겐지가 동화적 상상의 영감을 기른 그의 고향 이와테(岩手)현.
이와테현은 산이 많고 숲이 빽빽하게 펼쳐져 있는 도호쿠(東北) 지방의 시골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와 비슷하다. 동쪽으로 태평양과 맞닿은 이곳은 지난해 쓰나미 직격타를 맞기 전까지는 도시에 지친 일본인들이 잠시 심신을 내려놓기 위해 찾는 소박한 여행지였다.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배경이 된 한적한 시골이자 세계문화유산 등재 예정인 유명 사찰 주손지(中尊寺)가 있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곳이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에게 느리게 걸으며 음미하길 권하는 이곳은 제대로 일본의 시골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하나마키, ‘은하철도의 밤’의 작가 겐지가 사랑한 고향
‘은하철도 999’의 우울함은 밝음보다는 어두움에 천착해 철학적인 동화를 쓴 겐지의 동화와 꼭 닮았다. 이와테현에 깊은 애정을 간직한 겐지는 지역의 독특한 공간 설정을 취하거나 자연과의 교감을 녹이는 식으로 우주가 아닌 자신의 고향을 환상적인 동화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소박한 시골에 신비감을 품은 이들을 이와테현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이와테현 중서부에 위치한 겐지의 본적지 하나마키(花卷)에는 그의 문학 세계가 응축된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마을에서 홀로 뚝 떨어져 있는 ‘미야자와 겐지 동화촌’ 입구는 기차 역사처럼 생겼는데 따라 들어가면 곧 아기자기한 오솔길로 이어진다. 오솔길 곳곳에는 포인트가 있어 관광객이 이 지점을 지나칠 때마다 겐지의 시와 동화가 흘러 나온다. 본관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철골 구조물을 통과해야 하는데, 쏟아질 듯 아찔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뿐사뿐 낮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현실 세계에서 동화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원근감을 강조해 섬세하게 지은 구조물 덕분이다.
겐지는 계몽적인 동화 외에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이 거의 없던 시절 기존의 양식을 거부하고 독특한 환상과 공상의 세계를 개척했다. 동화촌 본관은 겐지가 꿈꾼 우주를 테마로 한 체험 공간과 전시실로 이뤄져 있다. 전시실은 하늘, 대지, 물을 테마로 꾸몄다. 너구리, 곰, 코끼리, 고양이, 쥐 등 동화 속 주인공들의 미니어처로 꾸며진 전시실에서 겐지의 작품 세계를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판타지홀도 있다.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것이, 수많은 일본 작가들의 문학관 중 단연 최고 방문객 수를 자랑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히라이즈미, 헛된 전쟁의 희생을 진혼하는 황금당
일본의 전형적인 작은 시골마을 히라이즈미(平泉)는 이와테현 남쪽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11, 12세기 혼슈(本州) 북방 지역의 중심지로 100년간 번창한 고장이다. 히라이즈미를 지배하며 영화를 누린 후지와라 가문과 관련한 3,000여개가 넘는 국보와 사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은 고층빌딩은커녕 번듯한 건물도 거의 찾아 보기 힘들어 옛 영화가 무색하지만 후지와라노 가문이 지배할 당시 교토(京都) 이상으로 번성했다. 대부호였던 후지와라 기요히라는 전쟁 통에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을 겪은 뒤 야욕을 모두 내려놓는다. 세상만사가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요히라는 전몰자를 공양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대가람 주손지와 황금당 ‘곤지키도(金色堂)’를 건립한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부처의 세계를 꽃피우는 데 앞장선 기요히라 덕에 히라이즈미는 지금의 불교문화 도시를 이루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우리가 경주를 가듯 불심 그윽한 이 도시를 방문하는데 수학여행지로도 많이 찾는다.
주손지로 오르는 오솔길은 수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나무가 양 옆으로 늘어서 청량한 나무 냄새를 풍긴다. 가벼운 산보 정도로 걸어 오르면 본당과 부속 건물들이 나오는데, 일본 천태종의 본산인 이곳은 아미타 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기요히라가 1124년 건립한 곤지키도는 당 내부와 외부 전체를 황금으로 덮은 화려한 건축물이다. 황금은 물론 나전칠기, 옻칠로 더없이 화려하게 꾸며 놓은 곤지키도를 보니 16년 간 정성을 들여 세웠다는 게 과연 허언이 아니구나 싶다. 금당 내부에는 공작 장식이 된 법단 위에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지장보살 등의 금불상을 모셨는데 그 위용이 대단하다. 일본 국보 1호인 곤지키도는 눈과 비에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목조 건물 전체를 유리벽으로 싸고 다시 콘크리트 건물로 에워싸 이중으로 보호하고 있다.
기요히라는 전쟁으로 희생된 지역 사람들의 넋을 달래려고 곤지키도를 지었다. 누구나 평등하게 구원받아야 한다는 절실한 기원의 산물이라 주민들의 지지와 칭송을 받으며 건립됐다. 그러나 훗날 이곳 금불상 아래에서 기요히라, 모토히라, 히데히라, 야스히라 등 후지와라 가문 4대의 미이라와 유해가 발굴된다. 영욕을 겪고 초탈한 무사도 끝내 인간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황금빛 석가 아래 제 가족을 묻은 것이다.
이와테=글·사진 채지은기자 cje@hk.co.kr
■ 모리오카의 명물 완코소바, 빈 접시로 탑 쌓으며 양껏 후루룩~
메밀가루로 뽑은 국수를 국물에 담가 먹는 소바는 일본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다. 그런데 소바 중의 소바로 꼽히는 게 바로 이와테현 모리오카(盛岡)의 명물 완코소바다. 유래는 약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에 영주가 이 지역에 들렀을 때 완(碗ㆍ작은 대접)에 조금씩 나온 소바를 몇 그릇이나 비웠다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 젓가락질 한두 번에 후루룩 먹을 만큼 적은 양의 메밀국수를 담은 그릇을 계속 내놓는 게 완코소바의 특징인데 귀한 손님을 접대하면서 만족할 때까지 맛보게 하는 풍습에서 나왔다.
특별히 완코소바 협회에서 인증을 받은 가게에 가면 일본 전통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영주에게 그랬듯이 옆에 종업원이 지키고 서서 소바를 비우는 즉시 다시 채워준다. 메밀이 불거나 국물이 식으면 맛이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메밀을 삶아 내놓는다. 딸려 나오는 참치회나 버섯조림, 연어알 등을 곁들여 먹으면 질리지 않게 완코소바를 즐길 수 있다.
음식과 함께 성냥갑을 주는데 다 먹은 빈 그릇 옆에 계속 쌓아 올리면서 몇 그릇을 먹었는지 센다. 여성은 20~25그릇, 남성은 30~35그릇 정도가 평균이다. 이 지역에서는 매년 일본 전역에서 대식가들이 몰려 들어 ‘전일본 완코소바 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데 최고 기록은 254그릇이다. 올해 대회는 2월 11일 열릴 예정이다.
이와테현의 또다른 먹거리로는 최고급 쇠고기 마에자와규(前澤牛)가 있다. 히라이즈미 인근 마에자의 특산물인 마에자와규는 육질이 부드러워 혀 위에서 녹는 맛이 일품이다. 자세한 정보는 일본관광청 공식 사이트(www.jroute.or.kr)나 스마트폰의 ‘제이루트(J-Route) 앱’(무료)에서 얻을 수 있다.
이와테=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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