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도 정치판에 나서면 소는 누가 키우나."
요즘 시민사회에서 일고 있는 우려의 목소리다. 한국 시민운동의 상징이었던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으로 선출되면서 거세게 일어난 바람이다. 박 시장의 '성공적인' 변신에 고무된 많은 젊은이들이 줄줄이 정치일선에 나서고 있다. '백만민란'을 주도하면서 민주통합당에 입성한 문성근씨의 주변에도 시민단체 출신이 즐비하다. 4월 총선을 직접 겨냥해 출사표를 던진 야심가도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386부대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하긴 정치가란 직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정치가가 되는 공식통로가 정해져 있지도 않다. 대학의 정치학과도 정치가 자격증을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정치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더욱더 정치는 힘들다. 누구나 꿈꿀 수는 있지만 섣불리 내딛을 길도 아니다.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평생 헤어날 수 없는 늪, 그게 정치의 세계다. 그런데도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경력을 마감하는 정치가는 극히 드물다. 시민운동에서 정치로 전환하는 것은 그다지 부자연스런 일은 아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와 엄격하게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이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과 같은 이른바 '선진국'과의 차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 오늘의 시민운동의 뿌리가 생성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일부 강경, 원칙론자들 사이에는 국가와 정부는 악이자 민중의 적이라는 관념이 더러는 남아있는 것이다.
현대민주정치에서 비정부기구(NGO)가 주도하는 시민운동의 역할은 중차대하다. 정부의 활동을 비판, 감시하고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유엔은 창립 이래 줄곧 NGO의 적극적인 참여를 운영의 대원칙으로 삼고 있다. 유엔문서에 통용되는 '시민사회'(civil society)란 용어는 곧바로 NGO를 의미한다. 비정부기구, 시민단체는 정부와 '불편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국책연구소처럼 정부가 원하는 내용을 복창하는 NGO는 존재이유가 반감된다. 그래서 이런 탈선 NGO를 일러 정부의 측근기관(near government organization)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한때 청와대의 홍위병부대라는 오명이 붙었던 단체도 있었다. 후일 정부에 몸담을 꿈을 꾸는 시민운동가를 '차기 정부공무원'(next government officer)으로 비꼬기도 한다. 바깥에서 아무리 악을 써 보아도 구악은 요지부동이니 직접 참여해 세상을 바꾸겠다며 나선 용기에 격려를 보낸다. 이들이 정치권 진입에 성공하고도 초심을 잃지 않기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해소할 계기를 마련하기를 빈다.
문제는 떠난 사람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다. 시민사회를 떠난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친정의 후원을 기대한다. 그러나 내보낸 쪽의 부담은 가중된다. 오래토록 외롭고 힘든 일을 함께 한 만큼 쌓은 정서적 결속력도 남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대종의 시민운동가들이 세칭 정치적 진보성향을 띤다는 점이다. 인적유착이 정치적 지향점과 한데 엮이게 되면 시민단체의 입지가 좁아지고 공신력도 떨어진다. 의제의 선정과 활동방식에 있어 보다 철저한 중립을 위한 자기 검열이 따라야 할 것이다. 시민운동가들의 정계 입문 소식에 환영과 우려를 함께 전한다. 문득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의 그 유명한 머리구절이 떠오른다. '영광의 세월이요, 또한 치욕의 세월이었다. ... 우리 앞에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후일 이렇게 넋두리를 펴지 않기를 빈다. 황순원의 문제작, <나무들 비탈에 서다> (1960)를 경구로 삼기 바란다. 작품에서처럼 전쟁을 치르면서 이땅의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혀 모두가 피해자가 될까 지레 걱정이다. 선거는 다름 아닌 국민이 평화시에 치르는 전쟁이니까. 나무들> 두>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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