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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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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

입력
2012.01.1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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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딥 스로트'(익명의 내부 제보자) 안 유(68)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의 한 마디가 놀라웠다. 그는 박종철군 사망 25주기 추도식이 열린 지난 14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학생들로부터 독재 정권의 주구 하수인 소리를 듣던 가해 집단의 일원이었다. 내가 한 일을 자랑할만한 입장은 아니다"고 소감을 말했다. 요즘처럼 너도나도 '광(光)' 팔기에 혈안인 때에 그는 여전히 마음 한 자락에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당시 행했던 일을 굳이 외부에 알리지 않고 20여년을 살아왔던 것도 그 때문이라 짐작했다.

1987년 1월15일 "탁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치안본부(현 경찰청)의 말도 안 되는 발표가 있고 며칠 뒤 서울 명동과 을지로 일대에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있었다. 그 숫자가 200, 300명도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엄동설한에다 방학 중인 탓인지, 아니면 군사독재의 서슬이 워낙 시퍼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시작은 미약했다. 이후 교묘한 술책으로 역사 속에 파묻으려는 전두환 정권과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확대 재생산하려는 민주화 세력의 각축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역사의 물줄기를 돌린 계기가 바로 경찰의 고문치사 은폐 조작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ㆍ29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민주주의의 여명은 그렇게 열렸다.

그러니 안 보안계장이 양심수인 이부영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에게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경찰의 조직적인 은폐 조작 사실을 알린 것은 결코 작은 행동이라 할 수 없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던 광폭한 군사독재 시절, 그 누구라도 침묵을 강요당했던 암흑의 시대였다. 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의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은 그의 용기를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선한 행동보다 양심수를 다뤄야 했던 일에 대한 빚진 감정을 더 드러내고 있으니 그의 소박한 양심이 더 도드라져 보였고 새삼스러웠다. 민주화 25년이 지난 지금 민주주의적 성취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6ㆍ10항쟁 시기에 고시 공부에 열중했다는 검사 출신의 김재원 한나라당 법률지원단장은 최근 출간한 에세이 에서 전대협 1기 의장 출신인 이인영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의 한결 같은 마음을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시대를 억누르던 권위주의 통치 체제는 그들의 용기 있는 희생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수고한 그들에게 갖는 마음의 빚은 최소한의 양심일 것이다."

하지만 김 단장은 "여의도 정치판에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많은 분들의 맨 얼굴을 보면서 가슴 속에 간직했던 부채의식을 하나씩 벗어 던졌다"고 했다. 숭고한 희생정신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권력을 얻었고 도덕적 우위를 점한 강자였을 뿐이더라는 것이다. 다분히 내년 총선용 에세이인 만큼 민주화 세력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섞여 있겠지만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작고한 민주화의 대부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더는 가슴에 달지 않겠다. 민주화 세력이라 해서 국민이 더는 우리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거나 민주화 운동세력도 세상의 권력을 향유했다. 도덕적으로 세상의 지탄을, 능력 부족으로 질타를 받았다. 그 과정에 국민의 눈과 의식이 변했다. 좌우니 보수ㆍ진보니 해도 민주진영이라는 말은 요즘 쓰지도 않는다. 가치는 보이지 않고 세력만 남은 형국이다. 이제는 시민운동가들까지 정치판에 뛰어들고 있다. 안유 씨의 소박한 양심이 아픈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부채의식의 마지막 잔영은 아니길 바랄 따름이다.

정진황 사회부 차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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