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이다. 그렇지만 영 설날 기분이 나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싶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그렇단다. 설이란 걸 감지하는 건 고작해야 언제 고향집에 내려가느냐는 안부를 물을 때가 고작이다. 설이 심드렁한 날이 되었다는 것은 썩 좋은 징조는 아닐 것이다. 설이 흔한 말로 달력 위의 빨간 날일뿐이라면 시간은 반쯤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는 불길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하면 우리는 물리학자가 말하는 시계 위의 시간을 떠올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실은 사람들은 대부분 복잡하고 다채로운 시간을 소유하고 체험하며 살아간다. 생일이 그렇고 결혼기념일이 그렇고 친지의 기일이 그렇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주검 위엔 생몰연대를 적은 묘비가 놓일 것이다. 그 시간은 한 개인의 생애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암시이다. 이런 것은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간이다.
사람들은 명절과 기념일을 챙기는 것을 촌스럽고 미개한 것으로 여긴다. 근대적인 보편 시간, 즉 시계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세계에서나 전통이니 관습이니 하는 관습의 시간에 매달리는 것쯤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조금만 헤아려보면 사정은 반대란 것을 깨닫게 된다. 실상은 한 사회가 가진 삶의 리듬을 표시하는 시간들은 언제부터인가 가짜 기념일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당장 성탄절이니 밸런타인데이니 하는 기념일들의 세계화를 생각하면 당장 그렇다. 어떤 이는 애플사의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될 날을 애면글면 기다릴 것이다. 그것도 전에 없던 새로운 글로벌한 시간이다. 이처럼 우리야말로 폭주하는 기념일을 가지고 있다. 최근 중국은 여러 전통명절을 되살렸다. 누구는 대뜸 국수주의 냄새를 맡겠지만 내게는 시장경제의 효율에 맞춰 긴 휴가를 즐기던 중국인을 단속하려는 속셈이 더 뻔히 보인다. 내리닫이로 여러 날 쉬는 것보다 짧은 전통 명절을 주는 것이 여러모로 시장과 장단을 맞추기 좋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에 없이 풍부한 기념일과 명절을 가졌어도 우리가 누리게 되는 시간은 더욱 추상적이고 맥없어 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시간은 어떻게 세상을 겪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자리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시간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맞게 길들이고 구체적 시간으로 빚어낸다. 그렇지만 시간을 생산하는 능력은 고루 배분되지 않는다. 한쪽에서 패스트푸드를 먹고 있으면, 저쪽에서는 슬로우 푸드를 먹는다. 이때 그것은 조리 시간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상품 속에 쑤셔 넣는 새로운 시간의 조작법일 뿐이다. 시간은 이윤을 쫓는 자들의 농간에 따라 널을 뛴다.
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하자면 가장 섬뜩한 시간은 화폐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돈이란 금융의 돈일 것이다. 시간으로부터 가치를 징수하는 일이 옛적에는 고리대금업자의 몫이었다면, 지금의 초현대적인 금융은 시간이 있는 곳이면 모든 곳에서 이익을 얻으려 한다. 이자를 넘어, 말 그대로 미래란 영어 낱말의 또 다른 이름인 선물로 나아가 환율을 위시한 수많은 금융상품들로 나아가며, 사람들은 시간에 패를 건다. 그 탓에 우리에겐 '지금 이 시각 증시'와 같은 시간이 절대적이게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시간이 멀쩡할 리 만무하다.
따라서 팔자 좋게 느리게 살자고 우긴다고 시간을 탈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도 역시 사회적 힘의 관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힘의 관계를 바꾸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물론 명절다운 명절을 맞자고 이런 소릴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시간을 숭배하는 금융 세계의 시간이 우리 시대의 표본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실은 더 많은 시간이 죽는다. 우리의 장래, 노후 그리고 우리가 쌓아온 세월의 흔적 모두가 금융적 논리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미래가 걱정이라면 노년자산플랜을 하라는 속삭임은 실은 어떻게 우리의 시간이 금융의 시간으로 번안되는지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 아닐까. 모쪼록 새 해에는 시간을 되찾고 싶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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