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머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대학 1학년 때 한 선배가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줬어요. '다락방'이라는 작은 서점이었어요. 신입생이 꼭 읽어야 할 사회과학 서적이었는데, 한참 오래 전 일이라 책은 사라졌고 제목조차 기억이 안 나요. 물론 그 서점도 없어진 지 오래되었죠. '다락방'에서는 책 제목이 들키지 않도록 항상 책을 노란색 꺼풀로 싸주었습니다. 책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노란색 겉장에 인쇄되어 있던 이 시만 기억나요. 이런 힘센 시를 쓴 시인의 모교에서 문예창작학과를 타과로 통폐합한답니다. 책도, 서점도 사라지고 서점이 있던 거리도 달라지고. 모든 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대학의 학과들도 달라지겠지요. 하지만 졸업생의 취업률 같은 형식적이고 일방적인 평가기준으로 학과의 존폐가 결정되다니…. 가난한 존재들의 사랑 노래가 계속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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