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로스앤젤레스주 대법원 판사 존 크랠릭(57)은 변호사 시절인 2000년 로펌을 시작하면서 사무실 벽에 '이상(理想) 선언문'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다른 로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정확한 법률 상담을 제공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상주의가 변호사 업계의 비즈니스 모델로 '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고객을 등쳐먹기 위한 수법으로 많은 변호사들이 선호하는, 법률적인 말장난으로 페이지를 늘리는 짓을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적자가 누적돼 파산 위기를 맞았다.
그럼 우리 법조계는?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미국에 비해 진입 장벽이 턱없이 높아 오랜 기간 특권적 이익을 향유해왔는데도 크랠릭 판사의 고백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실제 변호사는 장사치 정도의 냉소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소명의식에 철저해야 할 판ㆍ검사조차 탐욕에 눈이 멀어 비리에 연루되는 경우가 잦은 게 현실이다. '일부' 정치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바닥을 지나 땅밑 정화조 수준이고, 법원도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불신의 벽을 뚫지 못하고 있다.
멀리 '차떼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잇단 향판(鄕判) 비리와 벤츠 여검사 등 요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의 주인공들 중 상당수가 법조인이다.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 주역 또한 법조 출신이다. 돈봉투를 받았다고 폭로한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과 돈봉투 속 명함의 주인공인 박희태 국회의장,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과 관련해 돈 선거 의혹을 제기한 홍준표 전 대표와 원희룡 전 최고위원 등 법조 출신 의원들이 연일 뉴스의 중심에 오르내린다. 최연희ㆍ주성영ㆍ강용석 의원 등 한때 '성(性)나라당'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얻은 데 앞장선 주역도 하나같이 검사와 변호사 출신이다.
한나라당 의원 구성은 대한민국이 아직도 학벌사회임을 보여준다. '법조당(法曹黨)'을 자인할 정도로 법조인 출신이 많아 전체 의원 167명 가운데 22.7%(38명)나 된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뚫고 법조계에 진출했으니, 법조인 1명이 국민 100만 명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다. 검찰 권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2007년 이후 강재섭 박희태 안상수 홍준표 등 검사 출신 여러 명이 당 대표를 지냈다.
그 잘난 법조인이 국회에 많이 들어왔으니 의정 활동은 좀 나아졌을까? "법조인들은 기존 관념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부족하며 서민들의 삶과도 괴리돼 있다."(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ㆍ한나라당 비대위원) "판ㆍ검사 출신은 현장의 치열함을 모른다."(홍 전 대표)
엘리트 의식에 젖은 보수 법조인이 이끌었던 한나라당 4년 동안 인권의식이 후퇴하고 부자감세,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 1%를 위한 정책이 강화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확대재생산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법조인의 이해가 걸린 법안과 정책 마련에는 필사적이다. 변호사 등 고소득자의 세금 탈루를 막기 위한 세무검증제 도입 관련 법률이 국회에서 왜곡된 게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준법지원인 임명을 의무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변호사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난을 샀다. 율사 출신이 장악한 법사위가 '변호사 권익위원회' 역할을 하는 탓에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한 법률이 국회에서 누더기가 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법조 로비스트 수준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0.035%(판ㆍ검사 4,400여명, 변호사 1만2,600여명)에 불과한 법조인이 여당 국회의원의 약 23%를 점하는 현실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한나라당이 특권정당, 부자정당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어느 국민이 친서민 정책의 진정성을 믿겠는가.
고재학 경제부장 goindo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