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세없는 복지확대 실현 '물음표'… '과세 사각' 메우기가 첫단추
지난해 복지논쟁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우리 국민들은 세금이란 도로ㆍ철도ㆍ공항을 짓고 도시를 꾸미라고 걷는 줄 알았을 법하다. 한국은 사회기반시설(SOC)에 투입하는 예산이 주요 선진국의 몇 배에 이르는 지출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예산을 쏟아부은 양양ㆍ청주ㆍ무안국제공항과 각종 경전철사업은 지금 손님이 적어 운행할 때마다 적자다. 현 정부 들어서는 4대강 사업에 또 22조원을 쏟아 부었다. 그나마 올해부터 복지논쟁이 가열되면서 보육예산을 늘리는 등 예산의 조정이 시작됐다. 그러나 예산분배 조정만으로 복지확대를 해결할 수는 없다. 결국 올해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증세문제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한 "증세 미정", 민 "감세 철회"
한나라당은 지난해 말 '한국판 버핏세(과표기준 3억원 초과 소득자에 38% 세율 적용)'를 통과시켰지만 아직 증세에 대한 입장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은 버핏세에 반대했었고, 전반적으로 증세에 부정적이다. 반면 민주당은 지난해 8월 발표한 복지국가 공약을 통해 현 정부 들어 실시된 소득세ㆍ법인세 감세를 철회하고, 장내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증권거래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발표, 증세를 공론화했다.
한국일보가 평가를 의뢰한 5명의 전문가들은 증세 기조에 찬성했다(표 참조). "증세 없는 복지국가 실현은 거짓"(안창남 강남대 교수), "노인인구 증가ㆍ복지확대ㆍ통일 대비해서라도 국가 부채를 줄여야 한다"(박형수 한국조세연구원 연구기획본부장) 등 전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근로자ㆍ자영업자의 40~50%에 이르는 소득세 면세대상 축소, 현재 전혀 과세가 되지 않는 파생금융상품 거래세 도입에도 5명이 모두 찬성했다. 즉 과세 사각지대를 메우는 작업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영 한양대 교수는 "감면대상이 너무 넓다"며 "고소득층뿐 아니라 전 국민이 조금씩이라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교수는 "교육비 공제 등 주요 공제제도의 혜택은 고소득층이 더 많이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파생금융상품 거래세 도입에 대해 박형수 본부장은 "지난해 파생상품 거래가 1경원이 넘었는데도 과세가 전혀 안되고 있다"며 "경제가 성장하면 조세구조가 소득세 위주로 재편돼야 하는데, 파생상품은 차익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거래세라도 도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주식양도차익 과세도 5명 중 4명이 지지했다. 박기백 교수는 "불로소득인데 과세가 안되고 있는 것은 문제", 박종규 국회예산정책처 경제분석실장은 "주식시장이 성장해 악영향 줄 가능성 적다"고 했다.
버핏세(고소득층 소득세) 확대, 부유세(부유층 재산세) 도입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박형수 본부장은 "자산 자체보다는 이자소득ㆍ배당소득 등 소득과세 중심으로 가는 게 옳다"며 "연 4,000만원 이하 이자ㆍ배당소득에 세율이 너무 낮고, 일반근로자는 임대소득에 과세를 안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SOC 줄이고 복지 위주 재편해야
임주영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자자체에서 몇 천억짜리 사업을 해서 적자 나고, 손님 하나 없는 공항들이 즐비할 만큼 예산지출이 방만하고 비효율적"이라며 "증세에 앞서 지출구조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초호화 청사, 손님 없는 공항 등을 보면 국민들은 "저것이 나에게 지급됐어야 할 보육료, 의료비, 교육비로 지은 것이구나"하고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SOC예산이 포함된 경제개발예산 비율은 올해 17% 가량(SOC는 7%)으로 프랑스 4%, 독일 5.4%, 영국 5.7% 등(해외자료는 2005ㆍ2006년 기준, 조세연구원)보다 몇 배 높다. 국회의원들이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소위 '쪽지 예산'으로 자기 지역구 건설사업을 챙기면서 지난해 예산심의 과정에도 SOC예산이 정부안(22조6,000억원)보다 4,427억원이나 늘었다.
선진국들의 예산구조를 보면 독일은 복지ㆍ교육ㆍ보건 분야에 전체 예산의 69.2%(2006년), 프랑스는 67.4%(2005년)를 투입했다. 한국은 2006년 41.6%, 올해도 42% 정도로 추산된다. 국방비 차이는 2006년 한국이 7%(올해 10%)로 프랑스, 독일보다 4~5%포인트 높은 정도여서 예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증세 없이도 복지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정치권 주장에 대해 비웃는 목소리가 많지만 일정 부분은 사실인 셈이다. 민주당은 재정개혁만으로 2017년에는 최대 14조원을 복지재원으로 돌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증세ㆍ조세개혁으로 예상되는 추가 세제수익 22조8,000억원의 절반 이상이다. 민주당의 계산이 맞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복지확대 기조 속에 재정지출구조 개편은 증세문제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김지은기자 luna@hk.co.kr
■ 한국 조세부담률 OECD 하위 9위
우리나라 국민이 지는 세금 부담은 국제수준에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친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복지수요와도 엇박자가 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망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확정ㆍ발표한 조세부담률(2009년 기준)에 따르면, 34개국의 가운데 우리나라는 19.7%로 평균치인 24.6%보다도 약 5%포인트 낮았다. 조세부담률이 높은 나라는 역시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이다. 조세부담률 1위인 덴마크의 경우 47.1%로 우리나라보다 배 이상 많은 세금을 내고 있었다. OECD 국가 중 우리나라보다 조세부담률이 낮은 나라는 멕시코(14.5%), 일본(15.9%), 슬로바키아(16.3%) 등 8개국 뿐이었다.
조세부담률과 사회보장부담률을 합친 국민부담률도 우리나라는 25.6%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아래에서 5번째다. 2000년 22.6%에서 2008년엔 26.5%로 꾸준히 증가했지만 2009년에는 하락한 결과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 때문으로 풀이된다.
늘어나는 사회복지지출을 생각하면 답답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지출 비중은 2010년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7.6%로 34개국 중 33위였다. 그러나 증가율은 가파르다. 최근치인 2007년의 사회복지지출 증가율이 2.7%로 OECD 국가 중 4번째로 높았다. 바닥을 기는 조세부담률로는 앞으로 더 늘어날 사회복지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조세부담률을 높이면서 폭증하는 복지수요를 감당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힌 것도 그래서다.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현재 조세부담률을 향후 5년 안에 20.5~21% 수준까지는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빚 내서 복지하지 않으려면 개인소득세 확대, 임시투자액 세액공제 폐지, 불법 상속ㆍ증여 단속 등으로 세수를 확충해 부담률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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