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인과 친해지려면 성경 공부를 하라는 얘기가 있다. 지난 정권 시절,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 만나 성경 구절을 인용해 대화했더라면 한미관계가 달라졌을 것이란 말도 외교가에 회자된다. 부자 나라일수록 정치와 종교의 거리는 멀게 마련이지만 미국만은 예외다. 지난 크리스마스 연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하느님을 몇 번 언급했는지가 뉴스가 되는 나라다.
부자와 서민을 구별할 때도 빈부 차이보다 종교 차이를 먼저 살필 때가 있다. 그래서 선거에서 공화당을 지지하는 주를 뜻하는 레드스테이트와, 민주당을 지지하는 블루스테이트에는 모순이 발생한다. 부자 주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정작 부자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부자 주의 부자는 사회적 가치에서 덜 종교적이고, 가난한 주의 부자는 훨씬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주의 서민과 부자 주의 서민 사이에도 양상은 유사하다. 리무진을 모는 부자인 '라테 민주당원'과 자동차 경주에 열광하는 서민인 '나스카 공화당원'이 출현하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종교의 영향력은 선거철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5년 전 오바마는 종교 검증에 시달리다 예수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공개 신앙고백을 해야 했다.
최근 미국 대선 경선이 진행되면서 종교의 정치개입이 반복되고 있다. 보수주의 종교 지도자 150여명이 14일 텍사스의 한 목장에 모여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모르몬 교도인 롬니가 그들이 지향하는 보수적 사회 가치를 대변할 이상적 후보가 아니라는 게 이유다. 이들은 롬니 대신 정통 보수 후보 가운데 릭 샌토럼 전 상원의원을 밀기로 세 차례 투표를 통해 합의했다. 보수 종교 지도자들이 샌토럼을 선택한 것은 공화당 주자 가운데 보수적 색채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자칭 '예수 후보'인 샌토럼은 피임, 낙태, 이혼, 동성애, 동성결혼, 진화론 교육에 반대하며 가정과 사회적 가치에 초보수적 목소리를 내왔다.
복음주의 기도교도가 중심인 보수 종교 진영이 공화당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들은 1970년대 낙태, 동성애가 인정되자 정치권으로 발길을 돌렸다. 80년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를 위한 기금 마련과 풀뿌리 운동이 그 시작이었다. 이때까지도 복음주의 기독교도는 일반 기독교나 가톨릭보다 공화당 지지율이 낮았다. 그러나 90년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진보적 사회가치를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 추문을 일으키자 보수 종교 진영은 큰 자극을 받았다. 복음주의 기독교도들은 이때부터 강력한 공화당 지지층으로 부상했으며 이후 조지 W 부시 정부에선 일정 정치적 지분까지 행사하게 된다. 현재 복음주의 기독교도는 미국 유권자의 26%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샌토럼이 이런 보수 종교 진영의 기대에 부응할지는 미지수다. 그는 아이오와 코커스(당원대회)에서 반짝했을 뿐이고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선 사실상 꼴찌로 추락했다. 복음주의 기독교도가 60%에 달하는 보수의 표밭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21일)를 앞두고 발표된 지지율에서도 롬니는 물론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에 뒤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샌토럼이나 깅리치 모두 정통 보수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면 롬니를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누구도 양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보수 종교 진영의 샌토럼 지지는 보수 후보, 보수 진영의 분열을 가져와 도리어 롬니에게 유리할 수 있다. 2008년 대선 당시 보수 진영이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와, 프레드 톰슨 전 상원의원 지지로 쪼개지면서 중도 성향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게 1위 자리를 넘겨준 사례가 있다.
이태규 워싱턴 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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