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돈 봉투 폭로로 격랑에 휩싸였다. 한나라당은 황량한 벌판에서 삭풍의 추위를 실감하고 있다. 위기감이 고조되고 국회의원들은 패닉 상태다. 박근혜 위원장과 비상대책위원회가 주도하는 쇄신이 빛이 바랠 지경이다. 민주통합당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순조롭게만 보이던 당대표 경선이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 갈등과 내분의 씨앗을 잉태하게 됐다. 설 연휴가 끝나면 1년 열두 달 중 한 달이 지나는데 정치는 실종됐고 정부는 무력하다.
돈 봉투 파문은 마치 둑이 터진 듯한 양상이다. 한나라당의 2008년, 2010년 전당대회를 거쳐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으로까지 번졌다. 민주당도 15일 열릴 대표 경선에 이어 지난해 임시전국대의원대회, 2010년 전당대회와 원내대표 선거 등에서 돈 봉투가 오갔다는 의혹과 루머가 나돌았다. 수술 중 발견된 암세포 때문에 환자의 수술을 포기한 경우처럼, 대표 경선 일정 때문에 서둘러 봉합하긴 했지만 민주당에 대한 수사도 시간 문제일 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역시 한나라당이다. 소속 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철저하고도 신속한 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또 관행에 기대어 공공연히 자행해온 구태와의 단절을 새삼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속내는 딴판이다. 이번 파문이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위기 속에서도 정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차원 방정식 풀기에 골몰하고 있다. 가까이는 19대 총선 출마와 당선, 멀게는 연말 대선에서 정치적 권력의 단맛을 계속 향유할 수 있는 방안 찾기에 급급해 있다. 쇄신이니 탈당이니 재창당이니 하는 말들은 다 그런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궁박한 현실을 벗어나 보려는 몸부림으로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돈 봉투 파문은 그런 '꼼수'로 풀릴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냉담한 민심과 조소가 단지 돈 봉투 문제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제 파탄, '1%'를 위한 정책 고수, 국민의 입과 귀를 막으려는 통제ㆍ검열 술책,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비리, 선관위 디도스 공격으로 드러난 국기 문란, 여론 왜곡은 물론 임기 이후를 내다보고 진행된 보수 언론에 대한 후안무치한 특혜 등 4년 동안 이어진 현 정권의 패착과 실정, 오만과 국민 무시의 연장선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근원적으로는 '차떼기 정당'DNA가 대물림된 정권이라는 내재적 한계를 지난 4년 동안 말끔히 제거하지 못한 업보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민 앞에서 4년의 잘못을 참회하는 이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사태 책임자인 박희태 국회의장은 사과는커녕 침묵 속에 외국을 방문 중이다. 그 측근들은 사건의 얼개가 드러났음에도 마치 물증이 있으면 찾아보라는 식의 부인과 잡아떼기로 일관하고 있다. 국가 공권력을 농락하고, 지금껏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혈세를 쥐어짜준 국민을 능멸하는 낯 두껍고 몰염치한 행위다. 그러고도 선량이요 공복임을 자임할 수 있는가.
돈 봉투를 받아 챙긴 의원들과 주변인들의 침묵은 또 무엇인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챙기자는 속셈인가. 수사 쓰나미가 지나간 뒤 새 줄을 잡아 일신의 영달을 도모하려면 그저 납작 엎드려 알아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게 최상이라 판단했나. 그러니 국민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쏟아지고 정치가 도매금으로 욕을 먹으며 불신을 받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살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상황에 처해 있다. 살 길은 하나다.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다. 국민 앞에서 4년의 실정과 돈 봉투와 관련된 참회록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사죄하고 밧줄을 던져달라 해야 한다. 그런 모습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낮은 자세 운운하는 것은 파당의 이익과 총선ㆍ대선만을 의식한 대국민 사기극이다. 국민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다다랐다. 시간은 한나라당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황상진 편집국 부국장 겸 디지털뉴스부장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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