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놓아둔 배달 음식 그릇과 주변에 생긴 무지개 빛 기름띠, 그 위에서 기지개 켜는 검은 고양이 때문일까. 모양도 크기도 제 각각인 거리의 맨홀 뚜껑은 표정마저 다채롭다. 건물외벽 한쪽을 가리려 한 듯 벽면에 코팅 종이를 덧대어 시멘트로 대충 마무리한 모습이라든가, 공사현장에 급히 벗어둔 장갑과 일렬횡대로 늘어선 플라스틱 빗자루까지.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물들이 액자 속에서 생생한 빛깔로 나름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프랑스 사진가 프랑수아 블로코(74)씨가 첫 내한 사진전 '서울의 표면'에 담아낸 서울 강북 지역의 골목길 풍경이다. 지난해 6~9월 집중적으로 촬영한 사진 20여점은 기와지붕을 얹은 서울 통의동 류가헌에 걸렸다. 프랑스 아르덴 상공회의소장을 지낸 기업가인 블로코씨의 사진 경력은 40여년을 헤아린다. 출장이나 관광 길에 아프리카, 칠레, 중국의 소수민족, 인도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오다 15년 전 은퇴하고는 본격적으로 사진작가로 나섰다. 한국인 아내와 함께 20여년 전부터 매년 한두 차례 한국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던 터라 웬만한 한국사람보다 한국의 풍광을 더 잘 안다.
서울의 미학적 재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서울의 표면'이라는 주제로 그가 포착한 서울의 모습은 세계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을 도심의 스카이라인이나 랜드마크가 아니었다. 외국인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초라한 광경이 대부분이지만, 그의 해석은 달랐다.
"인도의 뭄바이나 뉴델리를 처음 여행했을 때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서울이란 도시는 조각난 단편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수 만개 생명의 집합체 같았죠. 계획된 도시 파리와 달리 서울 골목길은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인의 자유분방하고 당당하고 유연한 사고가 읽힌다고 할까요. 다른 도시가 부러워할 만한 진정한 모던함이죠."
줄곧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골목길을 누볐다는 그가 담아낸 풍경은 심각하지 않지만 가볍지만도 않다. 골목길 귀퉁이 볼록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풍경을 담은 이유를 묻자 "이렇게 왜곡된 모습이 진짜 현실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십자가와 아파트 공사현장을 병치시킨 사진을 통해서는 "오늘날 진짜 종교는 아파트로 대변되는 자본이 아닐까"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예전과 달리 서울 도심에도 산책 코스가 많이 생겨 반갑지만 아쉬운 점도 많다고 했다.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프라자 호텔에 묵었는데, 그 뒤에 빽빽하게 자리잡은 포장마차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죠. 신나게 음식을 주문해 먹은 기억이 생생한데 이곳이 사라진 게 너무 아쉬워요. 또 인사동의 골동품점과 피맛골 대신 높은 빌딩이나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들어서 안타깝죠."
그는 사진 작업을 통해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가 달린 문장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사진작가로서 뭔가를 이루기보다는 한국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바람도 전했다. 3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옮겨 그동안 상하이를 담아낸 사진들로 중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볼 참이란다. 이번 전시는 21일까지. (02)720-2010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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