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는 여름 바다보다 멀다. 하지만 이 계절 바다의 기별은 도시의 콘크리트 부엌, 산골 농막의 화덕까지 구석구석 찾아와 닿는다. 소금 푼 맑은 물에 토막 낸 생선, 또는 감친 해초를 넣고 끓이면 뽀얗게 우러나오는 겨울의 안식이 그것이다. 빙점의 바닷속을 유영하던 차가운 생명의 기운이 맹추위를 버티게 해주는 뱃속의 온기로 화하는 기분 좋은 아이러니. 그래서인지 뜨거운 국물을 목구멍으로 떠 넘길 때, 사람들의 입에선 청렬한 탄성이 튀어나온다. "시원하다!" 그 바다의 기별이 발신되는 곳으로 겨울 여행을 다녀왔다.
칼바람과 뜨거운 숨이 교차하는 바다
겁이 없었던 것 같다. 영하 15도의 강원 고성군 아야진항. 새벽 3시 30분에 출항한 배는 강화플라스틱(FRP)으로 만든 4.56톤 급의 대구잡이 어선이다. 배는 쾌청한 속도로, 퉁탁거리는 디젤엔진음을 뱉으며 어장으로 향했다. 역풍의 바닷바람에 체감온도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연안의 파도가 생각보다 높다. 배가 뒤집히기 직전까지 엔진의 힘으로 감았다 풀기를 반복하며 끌어올리는 그물의 무게는 플라스틱 배를 쉬지 않고 흔들리는 오뚝이인형으로 만들었다. 속에 든 것을 게워내는 입에 컴컴한 바다가 닿았다. 뱃멀미는 뭍에 다시 발을 댈 때까지 계속됐다.
"아, 거기다 그물 풀면 어떡한대! 정말 이런 식으로 하기요?"
멀미 탓에 선실에 구겨져 있는데도 억센 강원도 억양의 고함이 들렸다. 전날 친 그물을 올릴 때만 해도 무전기를 통해 농담을 나누던 어선들의 분위기는 새 그물을 내릴 때가 되자 살벌해졌다. 선주 이기호씨는 "어획량이 줄고 기름값이 오르면서 새벽 바리(조업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가 전쟁이 됐다"고 했다. 한 차례 조업에 15만원 가까이 드는 기름값을 건지려면 좋은 자리에 남보다 먼저 투망하는 수밖에 없다. 너비 2㎞의 그물을 걷어 갈무리하고 다시 새 그물을 펴는 3시간 동안 이씨의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쪽으로 희미한 수평선이 떠올랐다.
"형님, 아깐 미안했수다. 오늘 얼마나 했수?"
항구로 돌아와 화톳불을 쬐며, 서로 육두문자를 씹던 선주들이 멋쩍게 인사했다. 얼어붙었던 표정이 뒤늦은 아침 인사와 함께 풀어졌다. 이씨는 "매일 이런 식"이라며 웃었다. 남보랏빛 바다에 금색 햇살이 퍼질 무렵 경매인들의 트럭이 하나 둘 도착했다. 팔뚝만한 대구는 한 마리에 1만원, 그것보다 더 큰 놈은 2, 3만원이다. 새우가 옆구리를 파먹은 무지렁이는 뱃사람들의 국거리가 된다. 사실 그게 더 맛나다고 했다. 이씨의 부인이 아침을 지어왔다. 겨울미나리와 무를 썰어 넣은 대구탕 향이 그윽했다. 외발수레에 실려 낙찰을 기다리는 대구 비늘이 청록의 빛깔로 겨울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다.
육지에서 깊어지는 동해의 겨울
숟가락 넣으면 푹 고아놓은 사골 국물처럼 숟가락의 형태를 감춰버리는 황태해장국. 황태는 사계절 위장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철을 따지자면 살을 에는 추위가 지나간 2, 3월이 제철이다. 겨울 한 철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건조된 햇황태가 그때 출하된다. 지금은 지난해 러시아에서 수입해 배를 가른 명태를 통나무 덕대에 거는 상덕작업이 한창이다. 10여년 전 연안 명태의 씨가 마르면서 시중의 황태는 거의 100% 러시아산 명태로 만들어진다. 강원 평창군 횡계리의 해발 800m 고지 덕장. 먼 바다에서 온 명태가 대관령을 넘어온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인제군)용대리 덕장이 규모는 더 크지만 본고장은 원래 대관령이래요. 여기가 (황태 원산지) 함경도하고 기후 조건이 비슷하거든요."
덕장 주인 최영길씨의 말엔 대관령 황태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6ㆍ25 직후부터 함경도 피난민들이 대관령에서 명태를 말렸다고 한다. 알과 창자를 제거하고 흐르는 물에 씻은 명태는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12월 말부터 덕대에 걸리기 시작한다. 노끈으로 두 마리씩 묶여 찬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명태는, 그런데 건어물의 범주를 벗어난 감상을 여행객에게 선물한다. 녹지 않은 눈을 머금은 채 하늘을 향해 벌린 아가리, 동안거에 든 선원 같은 덕장의 침묵, 시선을 놓아버린 채 언제까지나 먼 곳을 관(觀)하고 있는 눈동자. 젊은 시인은 이렇게 묘파했다.
"이 눈보라 속에 저희도 무슨 잠 못 드는 시름이 있는지… 가른 배 속을 파고드는 눈보라 눈보라 아니 가른 배 속에서 산란하는 눈보라 눈보라"(손택수 '얼음 물고기')
미운 사위한테 주던 뜨거운 맛
기차 철로도 고속도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전남 장흥군. 서울에서 정남쪽으로 남해에 닿는 땅이다. 그러나 남쪽 바다의 겨울도 손톱이 쪼개지도록 찼다. 개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얕은 바닷가. 뱃사람들이 뱃전에 엎드린 채 두 팔만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언뜻 바다를 걸레질하는 듯한 움직임이다. 가까이?보면 대나무발에서 뭔가를 뜯어내고 있다. 찐득하니 물에서 끌려 나오는 짙푸른 무엇. 천조각 같지만 사람 머리카락보다 훨씬 가느다란 해조류의 뭉치다. '서울 촌놈'들이 최근에야 그 맛을 알게 된, 겨울 별미 매생이를 채취하는 모습이다.
"이거 먹다가 입천장 다 까져부렀단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겄소. 술 먹은 다음날엔 굴 까서 넣고 이거 끓여놓으면 그만이제."
매생이는 아이 머리통만한 크기로 실타래 사리듯 감쳐서 판다. 이걸 손질해 국으로 끓여내는 게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 파래나 김보다 올이 훨씬 가늘기 때문이다. 아무리 끓여도 김이 나지 않고 그릇에 떠 놔도 잘 식지 않아 요리하기도 먹기도 수월치 않다. 그래서 전라도에 "미운 사위놈한테 매생이국 준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은은한 향과 입 속에서 살며시 녹는 질감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기 힘들다. 외지인들이 그 맛을 알기 전, 김 양식장을 망치던 "웬수 겉던" 매생이. 하지만 이제 주민들의 겨울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주는 효자가 됐다.
"인자 매생이발에 김이 붙으면 욕이 나오제. 근데 서울 사람들, 진짜 이 맛을 알고들 먹는가?"
고성·평창·장흥=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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