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아시아를 여행한 것은, 아니, 정확히 말해 한국을 떠나 본 것은 1993년이었다. 그 전해인 92년 1월,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고(그 해 11월에 나는 첫 시집을 냈다), 불과 며칠 전인 91년 12월에 소련이 몰락했다. 그리고 그 바로 전해인 90년 10월에는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이 통일되었다(나는 그 해 여름에 첫 시를 발표했다). 90년대의 초입에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나는 좀 혼란스러웠다. 모두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말하고 있었고, 나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을,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아니라 역사의 종언으로 받아들였다. 역사에서 자유로운 '인간의 시대'가 왔다고 나는 굳게 믿었다.
그러나 내 강령은 그러했는지 몰라도 나의 실천은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정신의 육체는 80년대를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1학번인 나는 입학식을 끝내고 낯 선 하숙방에 누워 신군부의 공식 출범을 환영하는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평화로운 항구도시 속초에서 자란 나는 그 불꽃이 화약과 최루탄으로 이어질 줄, 짐작도 못했다. 80년 광주로부터 시작하는 이 기나긴 터널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지만, 93년 나는 그때 무슨 종소리 같은 걸 들었다. 그것이 끝을 알리는 종인지 시작을 알리는 종인지 알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여간, 종은 울렸다. 몇 몇 친구들이 공장에서 돌아오고, 뒤늦게 생업에 대한 궁리를 할 때 나는 티베트로 떠났다. 그것이 내 첫 여행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어디에 있든 여행자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 전 해인 92년 8월 '중공'이 아닌 '중국'과 정식 수교를 하면서 '자유중국'은 '대만'으로 불렸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들은 한 소식이 나를 티베트로 이끌었다. '죽의 장막'을 뚫고 나온 여행자들이 티베트 독립 시위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살펴보니 이 보도는 오보일 가능성이 컸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당시에 티베트에서 시위가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당시에 티베트에는 후진타오가 티베트자치구 공산당 위원회의 서기로 있었고, 89년 3월 라싸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후진타오는 직접 철모를 쓰고 진두진휘하여 일거에 진압한다. 그후 92년 중국 당국은 티베트 망명정부와 접촉을 재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가 있었더라도 대규모 시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 때문에 티베트로 떠났고,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말레이시아에서도, 태국에서도 여행자로 나는 살았다.
그리고 많은 아시아 국가들을 여행했다. 한 번 떠나면 최소 2~3개월 씩 머무르는 질긴 엉덩이 때문에 자연히 경비를 아낄 수 있는 지역을 고르다보니 그것들이 다 오지였고, 한 곳에 오래 있다 보니 자연히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에 점점 아시아가 좋아지게 되었다. 다산선생이 말한 '뜬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서 떠나는 자가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모든 순간 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자의 삶이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런 삶에서 가장 기뻤던 것은 그들을 진정으로 바로 보게 될 때이다. 그것이 미운 얼굴이든, 고운 얼굴이든, 나를 해꼬지하려고 했든 도와주려했든,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해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없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것만큼 큰 오해가 없다. 그것 때문에 가장 큰 폭력이 저질러질 수 있다. 이해는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의 사연과 정황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만 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아시아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서구식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보다,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그 다양성 속에 그들과 같이 서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이것은 그 기록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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