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대륙 탐사를 위한 전초기지인 패트리어트 힐을 떠난 지 44일 째. 탐험대원들의 몸은 천근만근이고 짙은 구름과 안개는 한 치 앞을 허락하지 않았다.
'화이트아웃'(눈 표면에 가스가 덮여 원근감이 없어지는 상태)현상으로 발을 내딛는 곳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극점은 도대체 어딜까. 방향을 잘못 든 건 아닐까. 선두에 선 허영호 공격대장의 눈에 잠시 긴장감이 서린다.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 대원들 모두 말이 없다.
영하 30도의 기온과 초속 20~30m의 바람에 얼굴이 퉁퉁 부었고 덥수룩한 수염은 온통 고드름으로 달라붙었다.
한 발 한발 내딛다 보니 드디어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1994년 1월 10일 오후 6시 30분. 마침내 은색 돔의 '아문센 스콧기지'가 눈에 들어오고 남위 90도에 위치한 지구 꼭대기, 극점에 도달했다. 허영호 대장 등 공격대 4명은 극점에 태극기를 꽂으며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해냈습니다! 여기가 남극점입니다!"
한국일보 창간 40돌을 기념한 남극점 탐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인 최초로 도보를 통해 남극점에 태극기를 꽂은 탐험대의 기록은 한 해 앞서 일본 탐험대가 비행기로 식량을 보급받으며 세운 67일의 기록을 23일이나 줄인 대기록이었다.
허영호 공격대장을 비롯한 대원 4명은 1인당 120kg의 장비와 식량을 썰매에 싣고 오로지 도보를 통해 44일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1911년 아문센의 남극점 첫 정복 이래 걸어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은 영국, 이탈리아, 일본에 이은 네 번째였다.
남극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북극과 함께 지구 3극점으로 불린다. 한국은 이날 남극점 정복으로 77년 에베레스트, 91년 북극점 정복에 이어 3극점을 모두 밟았다. 95년 허 대장은 남극 대륙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에 올라 3대 극점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 됐다.
이후 '세계 최초'의 수식어는 지난해 10월 18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신루트 개척 도중 실종된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도맡게 됐다.
박 대장은 93년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이래 2005년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세계 3극점을 모두 등반해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아직도 히말라야의 차가운 눈 속에 묻혀있을 박 대장의 명복을 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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