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한국영화 많이 나오고 있지만 전율 비슷한 걸 느끼며 본 영화는 두 편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2000년대 한국영화가 낳은 걸출한 두 작품 '친구'(2001)와 '말죽거리 잔혹사'(2004)다. 두 편 다 1970년대 후반의 고교생들 이야기이고,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서사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두 영화의 결은 상당히 다르지만, 적어도 그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전학 간 학교 교사들의 폭력, 또래들의 괴롭힘을 그 당시 젊음의 우상이던 이소룡의 절권도를 익혀 이겨낸 '말죽거리 잔혹사'의 주인공 권상우. 그는 마침내 학교짱을 무릎 꿇린 후 쌍절곤으로 교내 복도 유리창을 모조리 깨트리면서 절규한다. "대한민국 학교 XX라 그래!" 이 말과 '친구'에서 장동건이 유오성에게 하는 말 "내가 니 시다바리가?"는 이미 영화가 나왔을 때부터 국민적인 유행어가 되다시피 했다.
두 영화의 감독은 자신들의 학창시절을 각자의 영화에 리얼하게 투영했다. 30년도 더 전이지만 그때도 학교폭력은 온존했다. 학생들끼리의 폭력은 물론 교사들도 학생들을 대놓고 패던 시절이었다. 일제히 시커먼 교복 입혀놓고 머리 박박 밀어놓고, 획일화라는 폭력 그 자체가 교육의 지상목표가 되다시피 했던 시대였다. "대한민국 학교 다 XX라 그래"라는 권상우의 외마디는 그래서 한 고교생의 외침이 아니라 그 시대, 폭력적이었던 그때의 한국사회에 대한 젊음의 항변이었다.
"대한민국 학교 다XX라 그래"
학교폭력 때문에 지금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폭력은 분명히 달라졌다. 훨씬 잔혹하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차라리 낭만적이다. "함께 있을 때 우린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던 영화 '친구'의 포스터 문구는 차라리 로망이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중학교, 초등학교의 폭력 실태는 성인사회의 폭력 저리가라 할 정도다. 그걸 견디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 자살이라는 끔찍한 선택으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지난달 말 또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끝에 자살, 학교폭력 문제를 재점화시킨 대구의 중학교 2학년생 A군의 유서는 A4 용지 4장 분량이다. 13살 A군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써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참을 도리가 없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항상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내 친구들, 고마워. 또 학교에서 잘하는 게 없던 저를 잘 격려해 주시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A군이 세상에 없는 지금 그의 글을 인용한다는 것도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지만 어느 글이 이만큼 솔직하게 그 나이 때의 생각, 폭력에 대한 공포,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A군이 유서라는 형식으로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됐을 때까지 우리사회의 어른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학교라는 시스템에 어린 아이들을 몰아놓고, 가정이라는 허울 아래 그들을 키우면서, 도대체 어른들은 그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바람과 두려움과 분노와 사랑을 알고 있기나 한가. 그들의 폭력이라는 것도 어른들 폭력의 복사판 아닌가.
아이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
뒤늦게 학교폭력의 갖가지 실태가 경찰 수사와 언론을 통해 매일같이 까발려지고, 대책이란 것이 재탕삼탕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교사와 학교의 현장에서의 철저한 대응, 무관용 원칙에 따른 폭력 가해학생에 대한 엄중한 처벌, 평소 학부모에 대한 폭력예방 교육과 스쿨폴리스 등 제도적 대책, 모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사회의 어른들이 아이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1970년대 말에 "대한민국 학교 다 XX라 그래!"라고 외쳤던 권상우가 삼십몇 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사회라면 아마 "대한민국 어른들 다 XX라 그래!"라고 울부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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