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시간드는 취미는 사치" 인식…' 나홀로 취향'에 자족
600점대 토익 점수와 2점대 중반 학점의 대학 4학년 김모(29)씨. 지방대에서 수도권 공대로 편입 후 취업을 위해 졸업까지 미룬 그는 취직 전까지 친구들도 만날 생각이 없다. 김씨는 평일엔 도서관에서 토익 공부와 면접 스터디, 입사지원서를 쓰면서 보내고 주말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경마장 안전요원으로 시간당 9,000원을 받으며 일한다. 그는 "이런 현실에서 취미는 연애만큼이나 사치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20대 대학생은 학점 등 스펙 쌓기, 아르바이트에 바쁘고, 취업을 해도 20대 직장 초년생의 일상에 개인적 삶이란 없다.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자신만의 취미를 가꾸지도 못한다.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강회사에 다니는 이모(27)씨는 직장인이 된 지 2년째지만 퇴근 후 TV를 시청하며 쉬는 것 외에는 특별한 취미생활이 없다. 이씨는 "등산 등 스포츠 활동을 하고는 싶지만 자격증을 따기 위한 시험 준비 등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해 취미생활을 즐길 날이 올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2012년 대한민국 20대의 일상은 팍팍함 그 자체다. 과연 '여가의 향유'라는 게 있는가 싶을 정도다. 적어도 겉보기로는 재미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은 20대의 생활과 문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인터넷 웹진 '고함20' 윤형주(24) 편집장은 "인터넷 공간의 발달로 개인이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창구는 훨씬 다양해졌다"며 "대부분의 20대는 취미 활동을 과거처럼 집단이 함께 하기보다는 개인 차원에서 즐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취미나 여가의 향유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타인의 취미나 취향을 비교 평가하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친다. 최신 미국 드라마 보기가 취미라는 대학생 구슬기(26)씨는 "남의 기준으로 내 취미가 판단되는 게 싫다. 내 취미를 이야기해도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항상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남에게 자신의 취미를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20대가 향유하는 문화, 취미, 여가의 속모습이다.
밖으로 드러내는 취미나 여가의 겉모습은 튄다. 차별화다. 그게 잘 드러나는 게 바로 이력서 취미란이다. 20대들은 "열 글자 남짓 들어가는 한정된 칸 안에 자신을 전략적으로 드러내야 하기에 '이력서용 취미'가 필요해진다"고 했다. 대학생 김정찬(24)씨는 "남학생들의 취미가 보통 운동, 당구, 게임 등 특이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라 이력서에 쓰기 위해 우쿨렐레(기타 종류의 악기)를 배우는 등 일부러 취미를 만들기도 한다"며 "취미 역시 자기 경쟁력이라 생각하다 보니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취미는 대학 3학년만 돼도 포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유행에 민감한 패션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학생 패션잡지 '르데뷰'의 오수미(24) 편집장은 "종류가 많지 않은 어그부츠(양털부츠)를 살 때에도 최소한 친구와 같은 색은 피하려고 한다"며 "만약 친구와 같은 제품을 사면 따라 한다고 여길까 봐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20대들이 편집매장(개성 있는 디자이너의 브랜드만 모아 놓은 곳)을 즐겨 찾는 것도 이유가 있다. 희소성 있는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다. 이런 편집매장이 늘어나면서 더 마이너한 브랜드를 찾기 위해 남들이 안가는 곳을 찾아 다니는 20대들도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남과 다른 것을 찾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차별화 속에서 '간지'(멋을 의미하는 일본어)를 중요시한다는 게 문화전문가의 분석이다. 지난해 를 펴낸 우석훈 박사는 "자라(ZARA) 등 중저가이지만 젊은 층의 패션감각을 살린 SPA 브랜드나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 등은 비용은 싸지만 고품격 상품을 원하는 20대의 코드에 맞아 인기를 끌고 있다"며 "지금의 20대는 과거 어느 때의 20대보다 섬세하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수백 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젊은 관객들을 끌어 모았지만 지난해 제작비 100억 원 이상 들어간 '7광구', '마이웨이' 등이 흥행에 참패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 박사는 "섬세한 감성이 필요한 영화의 세부 내용은 미흡한 채 물량에만 의존해 젊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신에 20대는 '혜화, 동', '파수꾼' 같은 독립영화를 보고 록밴드 '국카스텐', '브로콜리 너마저' 등 다양한 인디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섬세한 취향을 만족시킨다.
겉과 속이 다르기도 하고 섬세하면서도 변화무쌍한 20대의 문화 정체성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3, 4년 전부터 등장한 '잉여', '루저' 등의 부정적 키워드도 20대의 공통 코藥?해석하기엔 부족하다"며 "최근 대학생들이 발표한 디도스 수사관련 시국선언이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한 정치적 목소리 내기 등을 볼 때 20대의 문화 정체성 키워드도 달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손현성기자 hshs@hk.co.kr
송은미기자
■ 웹툰 보면 20대가 보인다 팍팍한 일상·아픔 그대로
20대를 다루는 인터넷 웹진 '고함20'의 윤형주(24) 편집장은 "현재의 20대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웹툰"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만화에서는 하이틴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인터넷 웹툰이 스마트폰의 대세인 20대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다. 더욱이 여러 작가들이 다양한 소재로 20대 일상과 문화, 아픔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는 평가다.
각 포털 사이트가 앞다퉈 웹툰 서비스 중 20대에게 가장 인기 있는 웹툰 중 하나는 네이버에 연재중인 학원물 '치즈 인 더 트랩'(치인트). 치인트의 매력은 등록금과 학점 걱정에 허덕이는 평범한 여주인공의 대학 생활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완벽한 남자 주인공과 얽히고 설키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는 점. 또 등장인물들이 대학마다 꼭 한 명쯤은 있는 캐릭터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대학원생 이지윤(25)씨는 "조별 과제 에피소드에서 무임승차를 하려는 조원들 때문에 여주인공 혼자 밤새 발표 준비를 하지만 모두가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D학점을 맞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며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 공감이 갔다"고 말했다.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이 하나도 없는 캠퍼스, 방학 때도 과 사무실 사무보조 아르바이트와 영어회화 수업을 병행해야 하는 힘겨운 일상, 바쁜 시간을 쪼개 주말엔 점수를 채우기 위해 봉사활동까지 가는 모습은 2012년 20대 대학생 문화와 일상 그대로다.
치인트의 대학이 2000년대 후반을 살아가는 현재의 팍팍한 대학생활을 보여줬다면 2009년 네이버에 연재됐던 '연옥님이 보고 계셔'(연옥님)는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이다. 당시 대학을 다녔던 작가가 대학 시절 겪은 성장통을 그려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경제난과 생활고가 커지면서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고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한 한국 사회가 배경이다. 작가 억수씨(32ㆍ필명)는 "그 시절에는 대학마저도 IMF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다"며 "답답하고 무서웠던 당시의 대학 시절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재 억수씨가 네이버에 연재중인 '오늘의 낭만부'는 1996년 대학을 다녔던 남자 주인공이 2011년 복학해 '낭만부'를 만들어 학생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그렸다. 억수씨는 "IMF 이전 대학에 낭만이 존재하던 시절 학교를 다닌 주인공이 현재의 대학생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많은 20대가 처음으로 겪는 비정규직인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활을 그린 '와라 편의점',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의 일상 웹툰인 '고시생툰'역시 오늘날 20대의 고달픈 일상을 잘 투영하고 있다.
박소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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