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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11)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광흥창역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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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11)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광흥창역 버스정류장

입력
2012.01.0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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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친구의 수술비를 가방에 넣은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고, 소매치기 전과범은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남자는 이 곳에서 여자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지만 여자는 죽음을 앞둔 남자에게 '복수' 대신 따뜻한 희망을 선물했다. 버스정류장은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며 악연이 인연으로 숙성될 때까지 지켜봤다. 떠나고 돌아오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작은 공간, 그들에게 이 곳은 세상 어디보다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140번지.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소매치기 전과범 고복수(양동근)와 인디밴드 멤버 전경(이나영)이 만나던 버스정류장의 주소다.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정류장인 이 곳에서 두 주인공은 10년 전 메모지와 캔커피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했다. 시간이 흘러 정류장의 모습도, 주변 풍경도 많이 변했다. 가랑눈이 흩뿌리던 지난달 하순, 본래는 택시정류장인 이곳에서 '네 멋대로 해라'를 연출한 박성수 MBC 드라마국 부국장을 만나 2002년 여름으로 향하는 버스에 동승했다.

가난한 연애 천재들의 '핫 스팟'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있는 복수에게 경이 뛰어온다. 두 눈이 반가움에 반짝거린다. 경의 양 손에는 바나나가 하나씩 쥐어 있다. "잠깐, 그거 뭐에요?"(복수) "집에 있길래 집어 왔어요."(경) 복수는 뭔가 대단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씩 웃는다. "오, 그럼 우리 이거 버스 타고 서울 구경하면서 먹을래요?" 초등학생 아이처럼 경은 모든 게 신난다. "천재다. 연애 진짜 잘한다."

'네 멋대로 해라'의 버스정류장은 가난한 연애 천재들을 위한 쉼터다. 범죄자와 피해자로 만난 남녀가 다시 만나 연인이 되는 곳, 가진 것 하나 없어도 1,000원짜리 한 장으로 행복하게 데이트할 수 있는 곳, 옛 연인을 떠나 보내고 새 연인을 맞이하는 곳. 버스정류장은 아무도 독차지할 수 없는 공간이지만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공용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에서 신촌로터리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 나오면 만날 수 있는 택시정류장은 서울 시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시설물이지만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제3의 주인공이라 할 만큼 중요한 공간이다. 박성수 PD에게도 이 곳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서울 하면 골목길과 버스정류장이 떠올라요. 청소년기를 보낸 19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엔 휴대전화도 없어서 여자친구를 만나려면 집 앞을 어슬렁거리곤 했죠. 그 아이가 알건 모르건 골목길에서 기다려주고 바래다주는 것, 버스 타고 같이 가주는 것, 그게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어요. 나보다 젊은 연출자였다면 공간 경험도 다를 테니 장소 선택도 달랐겠죠."

요즘 같으면 스포츠카를 탄 '본부장님'이 캔디 같은 여자를 태우고 고급 카페와 고층 아파트를 오가겠지만 박 PD는 어릴 적 거닐던 골목길과 길거리를 주요 공간으로 삼았다. 그래서 달동네에 사는 소매치기 전과범도, 부자 아버지를 둔 인디밴드 멤버도 버스와 지하철에서 내려 걷고 또 걷는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서강대교 야경에 감탄하는 이들에게 자본주의적 계급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청춘의 패기가 있으니 버스정류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마시는 캔커피가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커피보다 더 호사스럽다.

서울 시내에서 쓰레기통 찾기보다 쉬운 것이 버스정류장이지만 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잡기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정서에도 맞아야 하고 촬영하기에도 용이해야 했다. 드라마 촬영이 이미 시작했는데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 제작진은 애를 태웠다. 박 PD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 기적처럼 이 곳을 발견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복수와 경의 특별한 공간이니만큼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습니다. 실제 버스정류장은 버스가 자주 다녀 촬영하기가 쉽지 않죠. 이곳에 소품으로 버스 표지판만 붙였어요. 인적이 드물고 교통량도 요즘처럼 많지 않아서 카메라 위치를 잡고 배우의 동선을 정하기가 편했어요. 새벽에 밤 장면을 찍을 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까지 들곤 했죠. 멀리 서강대교의 아치가 보이니 2002년 서울의 현재를 표현할 수도 있고, 미래(공효진)의 집과 경이 몸담고 있는 인디밴드의 연습실이 있는 홍대와도 가까워 공간적인 연결점도 있었으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 싶었습니다."

국내 최초 컬트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는 국내에도 소수의 열성적인 팬을 만들어내는 '컬트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첫 번째 작품으로 꼽힌다. '폐인'이라 불리는 팬덤이 형성된 최초의 드라마였다. 방송된 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설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지만, 기획 단계부터 전도유망한 드라마였던 건 아니다. 박 PD는 "당시만 해도 이 드라마가 망할 거라고 확신한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시한부 인생을 다루면서도 울리려고 애쓰지 않고 네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질척거리지 않는 관계를 그리는 등 흥행 드라마의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의 전형적인 틀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인정옥 작가의 탁월한 캐릭터 분석과 문학적 수준에 이른 대사 덕분이었습니다. 기존 드라마와 다르다 보니 당시 데스크에선 '현실에서 5cm 정도 붕 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대본을 봐도 말장난하는 건지 연애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몽유병자들 같다는 거였죠. 제가 연출한 전작 '햇빛 속으로'와 '맛있는 청혼'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기획하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드라마의 씨앗은 2001년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발아했다. 박 PD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청년이 주위 사람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웃는 연습을 한다는 말을 듣고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년이 자신의 꿈과 욕망을 이야기하게 해서 시한부라는 굴레에서 풀어주고 싶었다"는 그는 주인공 캐릭터를 고민하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루저'의 직업으로 소매치기를 떠올렸다. 몇 장의 시놉시스는 우연찮은 기회로 일면식도 없던 인정옥 작가에게 전달됐고 운명적인 협업이 이뤄졌다. 제목은 195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따왔다. "어감이 좋아서 가져온 것일 뿐 영화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누벨바그 감독 중에서) 트뤼포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영화를 만든) 고다르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제목을 기존 작품에서 따오는 것도 안 좋아했는데 그렇게 정한 건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네 멋대로 해라'를 준비하던 2002년 초반이 선거 국면이었거든요.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죠. 한국에서는 월드컵이 열리는데 이번엔 뭔가 다를 것 같은 분위기도 있었고요.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정치와 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기였습니다."

청년들이여, 쫄지 말고 네 멋대로 해라!

홍대 앞은 수많은 청춘들이 젊음을 소비하는 공간이다. 요즘은 상업주의에 찌들어 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자유분방한 젊음이 있는 '대안'의 출구였다. 젊은 예술가들이 꿈을 그렸고 다양한 장르의 인디밴드들이 부조리한 세상을 노래했다. 전경의 '미완성밴드'가 모이는 연습실이 홍대 앞인 것은 필연적인 설정이었다. 복수와 경이 레코드가게에서 가수 고복수의 CD를 사거나 미완성밴드의 데모 CD를 주고받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건 '홍대 앞'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홍대 인근을 비롯해 주로 야외에서 촬영한 덕에 '네 멋대로 해라'에는 세트 촬영의 답답함이 없다. 열린 공간이라면 어디건 이들에겐 데이트 장소다. 길거리와 골목길, 공원, 한강 둔치, 심지어 병원 옥상도 마다하지 않는다. 야외 촬영이 많을수록 촬영 스태프와 연기자들을 방해하는 요소가 늘어나지만 박 PD는 "자꾸 촬영하다 보니 스태프는 물론 배우들도 공동체 문화 같은 게 생겨 나중엔 편하게 촬영했다"고 말했다.

강산도 변하게 한다는 10년의 세월은 드라마 속 장소도 바꿔놓았다. 전경과 한동진(이동건)이 처음 만났던 레코드가게는 오래 전 자취를 감췄고, 아담한 녹색 대문이 인상적이던 복수네 집은 몇 년 전 대기업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집어 삼켰다. 그나마 정류장만이 합정과 신촌, 마포 등 번화가의 한복판에서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홍대 앞과 광흥창역 정류장은 2002년을 살았던 20~40대의 서로 다른 청년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70년대 청춘을 보낸 아저씨도 홍대 앞에서 인디밴드의 공연을 즐기고 현재의 젊은이들도 버스를 타고 일상의 연애를 한다. 복수와 경이 2002년 현재의 젊은이가 아니라 통시대적인 젊은이의 모습인 이유다. 박성수 PD와 인정옥 작가는 두 캐릭터를 통해 2002년을 사는 청춘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청년은 사회 속에서 길항할 수밖에 없는 존재죠. 싸우고 넘어지고 포기하고 다시 싸웁니다.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싸우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걸 결정하는 시기죠. 그렇지만 더 획일적인 가치관이 이들을 가로막습니다. IMF 구제금융 이후 급속도로 변했어요. 그러한 것에 대한 저항이랄까요. 부족한 대로 모자란 대로 아름다운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양동근에게도 고복수는 우주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우주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해줬죠. 중요한 건 삶에 대한 태도예요. 그건 본인이 찾는 겁니다. 訣?말고 하고 싶은 대로 '네 멋대로 하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드라마에서 복수는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뒤에야 비로소 살맛을 느낀다. 스턴트 연기로 버는 돈이 너무도 소중하고 여자친구와 나누는 대화 한마디가 너무도 간절하다. 그에겐 뒤를 돌아보는 시간마저 사치다. 복수가 경에게 말한다. "나 이렇게 골 아프게 안 살래요. 다들 헷갈리게 살다가 후회해요. 참고 사는 거 그거 웃긴 거예요. 지금 당장 미래보다 경이씨가 더 좋아요.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난 지금 좋아하는 거 하고 나중에 후회할래요." 골목길에서 손잡은 두 연인을 2002년 한여름의 태양이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국내 '폐인 드라마'의 원조

"기존 드라마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아직도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있어요. 가끔 광흥창역 근처를 지나면 저절로 정류장으로 발걸음이 옮겨지곤 합니다."

온라인 팬카페 '네멋대로해라+'(cafe.daum.net/mbc7)의 회원인 최석진(가명ㆍ37)씨는 지난 연말 카페 회원들과 송년회를 가졌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10년이 다 돼가고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20대이던 회원들도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겼지만 모임은 건재하다.

'네 멋대로 해라'(이하 '네 멋') 팬들은 드라마 열성 마니아를 일컫는 '폐인'의 원조 격이다. 2002년 월드컵 폐막 직후인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방송된 '네 멋대로 해라'는 '컬트'라 불린 국내 첫 드라마였다. 최씨는 "인정옥 작가의 인상적인 대본, 극중 캐릭터와 결합한 주연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네 멋'의 팬덤은 당시에만 해도 생소한 현상이었다. 팬들은 이미 본 드라마를 몇 번씩 보고 또 보는 것은 물론 무리 지어 촬영장을 순례하는 '투어'를 다녔다. 제작사와 박성수 PD를 채근해 감독판 DVD 출시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박 PD는 "드라마 DVD가 흔치 않았고 '모래시계' 같은 히트작 판매량도 500세트 안팎에 불과한 상황에서 '네 멋'은 팬카페 초도 주문량만 1,000장이 넘었다"고 회고했다. 8장으로 구성된 DVD는 총 3만 세트 넘게 팔렸다. 이후 '다모'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이 폐인 드라마의 계보를 이어갔다.

'네 멋' 폐인들이 늘면서 마포구 일대의 촬영지는 순례의 대상이 됐다. 서교동에 위치한 밴드 연습실을 시작으로 레코드가게, 미래의 집을 거쳐 버스정류장까지 이어지는 2.5km의 길을 걷는 것은 기본 코스. 종영 직후 정류장은 복수와 경을 그리워하는 팬들의 메모와 낙서로 가득했다. 선유도공원과 보라매공원, 그리고 경북 포항 호미곶까지 찾아가는 열성 팬들도 부지기수였다.

폐인들의 열기가 심상치 않자 영화 제작을 추진한 제작사도 있었다. 박 PD는 "이 드라마는 나, 인정옥 작가, 양동근, 이나영이 그때 뭉쳤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로 만들면 가치가 훼손될 것 같아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네 멋'은 여전히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2002년 촬영 전 고사를 지내며 "앞으로 10년은 기억될 드라마"라고 했던 그의 호언이 적중한 셈이다.

고경석 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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