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같은 소를 죽일 수도 없고, 비싼 사료 주며 키울 수도 없고…. 차라리 구제역 파동 때가 더 나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앞두고 소 값이 폭락하면서 전국 축산농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육우(젖소 수컷) 송아지 한 마리가 삼겹살 1인분 값도 안 되는 1만원 이하로 폭락하고, 한우 송아지는 2년 전에 비해 절반이나 하락하며 아예 거래가 끊겼다. 한미 FTA 영향으로 농가의 재산목록 1호였던 소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4일 전북 정읍시 덕천면 도계리의 한 축산 농가. 젖소 400여 마리를 키우는 김동규(67)씨는 며칠 전 새로 난 수컷 새끼 30여 마리를 고창과 임실 농가에 나눠줬다. 김씨는 "송아지 시세와 사료 값을 감안하면 도저히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줬다"며 "요즘 숫송아지를 낳는 것은 불행 그 자체"라고 한 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농협 등에 따르면 최근 육우(600㎏)의 산지 가격은 전년 동기대비 50만원 하락한 230만원 선. 하지만 이만큼 키우는 비용은 350만~400만원이 들어 전혀 수지가 맞지 않는다.
소 값이 폭락하자 산지에선 한 마리에 1만원 이하로 폭락한 육우 숫송아지가 사육하는 개의 사료로 팔리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육우 70여마리를 키우는 김기석(46)씨는 "개 농장에서 개 먹이로 숫송아지를 1만원에 사겠다고 해 자존심이 상해 팔지 않았다"며 "배고파 우는 소리를 듣고 어린 소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수 없어 손해를 보면서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3일 전북 순창에서는 육우 10마리가 굶어 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주인 문씨는 "40년 간 소와 함께 살아왔는데 굶어 죽은 소를 묻는 가슴이 어떠했겠냐"며 "자식 같은 소와 운명을 같이할 생각"이라고 한탄했다.
가격 폭락도 문제지만 소 사료 가격이 1만1,000원(25㎏)이나 하는 등 최근 2년 사이 17% 이상 올라 축산농가를 더욱 괴롭히고 있다.
문제는 소 값 파동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축산농가와 전문가들은 육우에서 시작된 소 값 파동이 한우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4일 경북 예천군 용궁면 용궁우시장.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100여 마리가 출시된 이날 얼마 전까지만 해도 250만원까지 하던 한우 암송아지가 3분의 1 수준인 85만원 선에서 거래됐다. 예천축협의 김종훈(55)씨는 "한우가 공급 과잉 상태라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정부도 수입쇠고기 물량을 줄이든지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구제역 파동이 휩쓸었던 안동에서는 한미 FTA에 따른 불안심리가 퍼지면서 '손해보기 전에 출하하자'며 소 투매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우 300두를 키우는 권모(54ㆍ안동시 서후면)씨는 "사료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울며겨자먹기로 소를 키우고 있다"며 "주변에서 먼저 파는 사람이 임자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말했다.
브랜드 한우를 비교적 잘 운영해온 강원도에서는 가격 폭락으로 축산농가들이 한우 입식을 포기할 조짐을 보이면서 축산 기반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더구나 최근 브랜드육 사업을 시작한 일부 지역 축협과 농가들은 상당한 규모의 대출까지 안고 있어 집단 파산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횡성축협 고명재(65) 조합장은 "정부가 수입육 증가에 따른 한우 수급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축산농의 대거 붕괴가 불가피하다"며 "정부가 FTA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전국한우협회 등 축산 농가들은 소 값 폭락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5일 전국의 소 1,000마리를 청와대 앞으로 끌고 와 한우 반납 단체행동을 할 예정이다.
순창=최수학기자 shchoi@hk.co.kr
안동=권정식기자 kwonj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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