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아휴직? 말도 못꺼내요"… 눈칫밥 먹는 직장맘의 눈물
대기업 유통업체 홍보실에서 12년째 일하는 황규란(36) 과장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새해 출근 첫날인 2일만 해도 그랬다. 그는 시무식에 참석하는 대신 병원으로 아이를 들쳐 업고 뛰었다. 19개월인 둘째 아이가 사흘 전부터 열이 나고 구토를 하는 급성장염으로 밤마다 응급실 가기를 반복했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 아이 둘을 키우는 직장맘에게 드물지 않게 있는 일이다. 그 때마다 업무를 다른 팀원에게 미뤄야 하는 황 과장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엔 한창 일이 바쁘던 오후 3시쯤 친정 어머니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큰 아이가 복통이 심해 동네 소아과에 데려갔더니 맹장염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는 전화였다. 응급상황은 늘 그의 몫이다. 회사에 사정을 설명하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직행했지만 검사에 진찰까지 대기. 둘째를 봐주는 육아도우미의 퇴근시간인 저녁 8시가 되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아, 그때는 정말 울고 싶더라고요. 제 몸은 하나인데…." 황 과장은 "남편은 자신이 가장이니 회사가 1순위라는 생각이 확고해요. 더구나 애가 둘이니 결혼까지 시키려면 70세까지는 경제활동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회사에 충실해야 한다는 거죠"라고 말했다.
둘째를 낳고 나서는 육아 도우미 구하기도 쉽지 않다. 알선업체 5~6곳에 요청을 하고 몇 주를 기다린 끝에 집에 온 도우미는 "애가 하나인 줄 알았다"며 뒤도 안보고 돌아가기도 했다.
'일ㆍ가정 양립의 추구'는 시대적 화두지만 육아문제의 해결은 좀처럼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다. 살인적인 노동시간, 업무에만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직장문화, 실효성 없는 보육제도 등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직장여성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가공할 정도다.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61.8%)에 크게 못 미치는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2010년 54.5%),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2011년 1.23명)은 육아에 대한 여성의 부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2010년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여성노동자 1,18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생활을 위해 출산을 조절(인공유산, 출산시기 조절, 자녀수 조절 등)했다는 여성은 40%에 달했다. 자녀출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도 56%였다.
6세 아들을 키우는 온라인 쇼핑업체 홍보실의 이수미(37ㆍ가명) 과장은 육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직장문화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6년 전 아이를 낳았을 때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은 말도 꺼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를 아침 일찍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하는 요즘은 오전 8시 출근을 강요하는 회사의 태도가 야속하다"고 말했다.
그나마 정규직 여성들의 형편은 나은 편이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여성들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서울여성노동자회의 비정규직 상담보고서에는 보호는커녕 차별 받는 여성들의 분노가 생생히 드러나있다. '임신사실을 알렸더니, 현장 나가기도 힘들 테니 3개월치 월급을 받고 퇴사하라고 종용했다'(건축설계회사 비정규직 여성), '출산휴가를 쓰겠다고 했더니 법으로 보장된 3개월 중 두 달만 쓰라고 했다. 여성이 대다수인 직장에서 있을 법한 일이냐'(산부인과 근무 비정규직 여성), '임신여성은 다루기 힘들다며 주6일 근무하는 곳으로 전보조치했다'(콜센터 근무 비정규직 여성) 등 부당한 처우가 만연해있다.
이들은 대표적인 보육지원제도인 육아휴직급여 혜택에서도 소외돼있다. 고용보험가입률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비정규직의 고용보험가입률은 36.9%. 10명 중 6명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출산 전 경력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출산과 육아 등으로 경력단절을 겪은 여성이 재취업시 비정규직으로 취직하는 비율은 50%를 넘는다.
'육아는 남녀 공동책임'이라는 인식의 부족, 남성 외벌이 시대의 편견으로 인해 있는 제도조차 충분히 활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육아휴직급여는 남녀 모두 받을 수 있는데도 현실은 '여성용'에 그쳐, 출산하는 직장 여성만 회사의 눈총과 경력단절의 부담을 떠안는다. 지난해 11월 기준 육아휴직급여를 받은 직장인(5만4,172명) 중 남성은 1,287명으로 전체의 2.3%에 불과했다. 보육지원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조차 지난해까지 3년간 육아휴직을 이용한 남성직원은 20명에 불과, 여직원(482명)의 4% 남짓에 그쳤고, 고용노동부의 경우 38명막?여직원(1,731명)의 2% 정도였다.
지난해 5개월 간 아내 대신 육아휴직을 썼던 임대경(39ㆍSK C&C)씨는"3,000명이 넘는 남성직원 중에서 육아휴직은 두번째였다"며 "어머니가 남자가 아이를 본다는 점을 못마땅해 하셨고, 경력에서 손해를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법정한도(1년)를 못 채우고 5개월 뒤 복직했다"고 털어놓았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실장은 "자녀가 영아(1세 이전)일 때 남성이 한달 동안 유급 출산휴가를 가도록 의무화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숙진 젠더사회연구소장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조직문화와 인력구조상 남성육아휴직률을 높이기 쉽지않을 것"이라며 "공공보육시설의 과감한 확대 등 보육의 공공서비스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김지은기자 luna@hk.co.kr
■ 육아, 선진국에선…
스웨덴에는 오직 남자만 쓸 수 있는 육아휴직이 있다. 부모가 합해서 480일간 육아 휴직을 쓸 수 있는데, 이중 60일씩은 전적으로 어머니 혹은 아버지만을 위해 제공된다. 즉 여성 혼자 480일을 다 쓸 수 없다. 남성이 60일을 쓰지 않고 여성만 쓴다면 420일의 육아휴직만 쓸 수 있다. 때문에 스웨덴은 아버지의 3명 중 1명(35%ㆍ2006년 기준)이 육아휴직을 쓰고 있다. 여성만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고, 이로 인해 여성의 경제활동이 줄어들어 노동력 손실이 오는 것을 줄이기 위한 조치이다.
노르웨이 등에도 남성에게만 할당된 육아휴직 제도가 있으며, 북유럽 국가들이 비교적 높은 출산율을 유지하면서도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높은 이유다. 스웨덴의 2010년 출산율은 1.98명으로 우리나라(1.23명)를 훨씬 웃돌았다.
육아휴직을 할 경우, 우리나라처럼 가계가 흔들리는 손실도 없다. 스웨덴은 육아휴직 기간 중 390일간 기존 소득의 80%, 나머지는 정해진 금액을 지급한다. 우리나라는 월 50만원씩 지급됐다가, 그나마 지난해부터 통상임금의 40%(최대 100만원까지)를 지급하는 수준이다.
프랑스에서는 임신을 하면 정부로부터 "임신을 축하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것은 당신만의 부담이 아닙니다. 당신 옆에는 국가와 사회가 있습니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프랑스는 말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국가다. 임신ㆍ출산의 모든 비용을 지원하고,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자녀 1명당 월 수십만원 가량의 자녀수당이 나오며, 자녀가 2명 이상이면 특별수당도 나온다. 국적도 상관 없다. 2008년 6남매를 둔 미국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앤젤리나 졸리 부부가 프랑스 남부 마을에 주택을 구입하고 주민으로 등록하자, 매달 아동 수당으로 약 270만원을 받게 됐다. 또 만 3~5세 아동의 보육시설 취원율이 100%에 이르러, 프랑스는 출산율이 증가하면서 여성 취업률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는 출산율은 2008년 2.0명으로 올라섰다.
문무경 육아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경우 소득지원이 부족해 육아휴직이 활성화되지 못하면서 젖먹이 아기마저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데다 국공립 보육시설(약 5% 안팎)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북유럽 등 유럽선진국들은 보육시설의 70% 이상이 국ㆍ공립이며, 나머지도 직장보육시설이나 부모들 모임으로 이뤄져 사실상 보육의 모두를 사회가 책임진다고 덧붙였다. 더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자녀수당이 없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미국 터키 멕시코 4개국 뿐이다.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면 일-가정 양립을 가능토록 하는 답은 명확하다. 0~1세 영아는 육아휴직 활성화 정책으로 부모들이 책임지고, 유아기는 정부 보육시설에서 책임지며, 아동ㆍ청소년이 되어서는 양육수당을 지급받아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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