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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 모란공원에서 영면/ "김근태, 영원한 청년 동지이자 이정표…우리는 그대를 잊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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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김근태 모란공원에서 영면/ "김근태, 영원한 청년 동지이자 이정표…우리는 그대를 잊지 못하리"

입력
2012.01.0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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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자' 고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700여명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3일 모란공원에 울려 퍼졌다. 하늘도 이승과 작별을 고하는 그의 마지막을 애달파하는 듯 눈발이 거셌다. 정희성 시인은 이날 영결식에서 조시 '그대를 잊지 못하리'를 낭송하며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라고 고인을 영영 떠나 보내는 아픈 마음을 담았다.

김근태 고문은 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날 오후 1시40분쯤 하관식이 진행되자 내내 차분해 보이던 김 고문의 부인 인재근씨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흐느꼈다.

고인과 고교ㆍ대학 친구로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도 울음을 터뜨렸다. 홀로 맑게 웃고 있는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는 십자가에 박힌 예수의 상이 놓여져 그가 살아온 천로역정을 말해주는 듯했다.

경기 안산시에서 온 신윤관(44)씨는 "고인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민청련) 활동을 좇아 청년운동을 했던 후배로서 그는 영원한 청년 동지이자 따라가야 하는 이정표였다"며 "그런 그가 고문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는 게 너무나 비통하다"고 말했다.

이날 진행된 하관식에선 김 고문의 웃는 얼굴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 아래에서 추모객들이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라고 적힌 붉은 천으로 관을 덮고 흙으로 취토했다. 김 고문은 문익환 목사, 노동자 전태일 등이 묻힌 모란공원에서 그렇게 영면에 들어갔다.

앞서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 본당에서 추모 인파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영결 미사가 열렸다. 함세웅 신부는 영결미사에서 "김근태 형제는 불치의 병마와 투쟁하면서도 블로그에서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며 참여하라고 당부했다. 이제 99%의 참여로 평화 민주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을 하며 이 미사를 봉헌한다"고 밝혔다. 추모 미사 마지막 순서에선 추모객들이 고인이 애창하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다 같이 불렀고 참석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어진 영결식에서 원혜영 민주통합당 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김 고문의 고통은 독재의 어둡고 참혹한 시절을 기억하라고, 그래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것인지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역사의 문신"이라며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99%의 서민과 중산층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영결식 후 운구 행렬은 청계천 전태일 다리로 이동해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도 지냈다.

김 고문은 민주화 운동의 산 증인이었다. 그는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 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83년 민청련을 만들었다. 이 일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89년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이끌었고 80년대까지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다.

김 고문은 민주화 투쟁 경력으로 재야파의 대부로 불렸지만 '직업 정치인'으로서 받은 평가는 박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털어놓고 '아름다운 꼴찌'로 남았다. 2004년 총선 후 공약이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놓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논쟁해보자"고 했지만 동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당해야 했다.

김 고문이 가장 아꼈던 이인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고인은 전체 삶이 훌륭했다. 정치인은 수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다"며 "오랜 역사를 놓고 볼 때 정치가 좋아져야 세상이 좋아지는데 그런 밑자락을 깔아준 사람"이라고 고인을 기억했다.

김 고문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7년부터 파킨슨병도 앓았다. 지난달 10일 딸 병민씨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면서 그의 투병이 알려졌고 지난달 30일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갔다. 병민씨는 이날 오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많은 분들께는 민주주의자 김근태로 기억되길 바라고, 저는 저에게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을 선물해준 가장 저의 사랑하는 아버지로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양주=권영은기자 you@hk.co.kr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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