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메아리]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입력
2012.01.03 12:03
0 0

새해 아침에도 침울한 기분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세모(歲暮)는 스산했다. 거리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조차도 하염없이 비정할 뿐이었다. 자식 둔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았을까. 망년회에서도 속 끓는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가슴이 턱 막혀서 앞이 캄캄한 거야. 냅다 집어 던지고 싶은 맘뿐이더라구."

중학생 딸의 '왕따'문제로 수년 전 담임교사를 면담한 적이 있다는 한 지인은 감정이 되살아 난 듯 격해졌다. 딸은 그 즈음 자주 멍하고 불안해했으며, 아침에 집을 나설 땐 짓눌린 듯 뒷걸음질치기 일쑤였다고 했다. 하지만 절박한 호소에 돌아온 건 뜨뜻미지근한 훈계뿐이었다. "아버님, 여학생들끼리 삐치고 헐뜯고 하는 건 너무 흔해서 말이죠. 암튼 신경은 써 보겠지만, 너무 유난 떨 수도 없는 거고…"

지인은 자동차 정비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교사의 반응을 옮기면서도 특유의 익살을 버무렸다. "차가 덜덜거리면 얼라인먼트가 문젠지, 타이밍벨트가 안 좋은지 점검하고 해답이 나와야 할 것 아니오. 근데 학교는 절벽이야. 수리하려고 온 손님한테 차는 원래 다 그렇다고 말하는 정비공이 어디 있나."개탄보다는 익살에 허허 웃고 말았지만, 세상을 잇달아 버린 어린 영혼들의 막막함이 새삼 가슴을 저며왔다.

'왕따' 호소에 냉담한 반응만

대구 중학생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학교폭력과 '왕따'로 학생들이 잇달아 무너지자 진단과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게임이 폭력성을 부추긴다는 분석이 있었고, 성적 경쟁이 인성교육을 망쳤다는 주장도 나왔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학교에 전문상담사를 배치하고, 폭력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는 엉성한 대책을 급조했다가 욕을 먹자, 이번엔 폭력학생들에 대한 '무관용원칙(zero tolerance)'까지 들고 나왔다. 여기에 폭력 예방교육을 해야 한다거나, 외부인사로 구성된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학교에 두자는 얘기, 지역 교육청에 폭력예방 담당관을 신설하자는 주장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학교보안관이나 교육청 생활지도 담당관이 없어 학교폭력과 '왕따'가 끊이지 않았던가. 또 상담사나 학생 징계시스템이 없어 비극이 되풀이 돼온 건가. 우후죽순식 진단과 대책에 선뜻 믿음이 가지 않는 건 그것들이 오히려 학생지도의 핵심을 흐리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이번에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들의 공통적 상황은 부모와 선생님이라는 최후의 '기댈 언덕'이 '유리벽' 너머 저쪽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식 잃은 고통과 자책을 평생 안고 가게 된 부모의 책임을 새삼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이들과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와 교사들이 수개 월간 지속된 '왕따'와 특정 학생에게 수십 차례나 집요하고 잔인하게 가해진 폭력을 몰랐다는 건 도저히 양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일엔 징후가 있고 기색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당한 학교와 교사들은 그걸 놓쳤다. TV드라마 연기자들은 표정과 몸짓으로 감정과 다음 회의 사건을 예고한다. 학생들은 뜻밖의 침묵이나 아래로 깔리는 시선, 기운 없는 목소리나 공연한 짜증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을 것이다. 교실이라는 연속극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야 할 교사들이 배우들에게 흥미를 잃고 마음을 닫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사가 '유리벽'을 깨야 변화

교사에게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식의 고아한 스승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 없는 시대다. 하지만 직업인이라고 해도, 공교육에서 학생에 대한 전인(全人)적 지도는 여전히 전문인으로서의 교사의 책무다. 교사가 지식의 전달자일 뿐 아니라, 학생 상담자이자 궁극적인 '기댈 언덕'이 돼야 한다는 요구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제 겨울 방학이 끝나면 각급 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된다. 박봉과 열악한 여건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께 송구스럽지만, 제발 냉담의 '유리벽'을 깨고 아들 딸, 잘 살펴 주십사 하는 말씀을 올린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