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달지 말라" 경제위기 빌미 反자유·非인권 독버섯처럼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재정이 어려워지자 긴축정책을 확대했다. 치솟는 물가로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국민들은 줄어든 복지 혜택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비난의 화살은 위기를 초래한 무능한 정권으로 향했다. 유권자들은 선거에서 기존 정부를 갈아치우며 그들을 심판했다. 경제 위기로 EU 회원국들의 격차가 두드러지면서 지원을 받을 회원국과 지원을 해야 할 회원국의 갈등도 첨예해지고 있다. EU의 공동체 의식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경제위기로 민주주의 가치가 심각한 훼손을 입고 있다고 진단한다.
헝가리 민주주의의 위기
헝가리의 집권 여당 피데스(청년민주동맹)는 지난해 헌법을 개정해 1일 발효했다. 정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50%를 초과해도 정부의 재정과 세제 관련법의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개정 헌법에 넣었다. 현재 헝가리의 정부부채는 GDP 대비 약 80%로 매우 높은 편이다. 재정이 파탄 지경인데도 헌법재판소가 정부의 국가예산과 세금문제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경제 위기를 초래한 정부에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개정 헌법에는 사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언론자유를 탄압하는 한편 기업국영화 등 정부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도 많이 포함돼 있다. 이를 두고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달 11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과거 집권 사회당이 긴축정책을 펼치면서 극심한 경제난을 겪었던 헝가리 국민이 이후 경제성장을 약속한 우파 정권을 선택했다”며 “그렇게 탄생한 우파 정권이 권력 유지를 위한 헌법 개정안을 가결시켰다”고 지적했다.
우파 정당의 득세
재정위기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상당수 EU 국가에서 정권이 교체됐다. 기존 정부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이었다. 특히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등은 우파 정권을 선택했다. 우파 정권은 과거 반이민자 정책 등 정치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이번에는 유로존 탈퇴, 반유럽통합, 세계화 반대 등 자국의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경제적 이슈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은 우파 정권은 복지 지출 축소 등 강력한 긴축정책을 펴고 있다. 지난해 말 여론 조사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에 이어 3위를 차지한, 프랑스 극우 국민전선의 당수 마린 르펜은 “유로가 우리 경제를 질식시키고 산업을 죽이며 고용을 억누르고 있다”며 프랑스의 유로존 탈퇴를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다. 네덜란드의 극우성향 자유당은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된 뒤 유로존 탈퇴, 자금지원 반대 등을 강력하게 추진해왔다. 자유당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저소득층 이민자를 제한하고 그들에 대한 복지 예산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극우 성향을 보이는 핀란드의 진짜핀란드인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제3당으로 약진했다.
민주주의 선호도 하락
민주주의에 대한 EU 회원국 국민의 선호도도 뚝 떨어졌다. 특히 2004년 뒤늦게 EU에 가입한 헝가리, 체코, 폴란드, 루마니아 등 신 EU 회원국의 민주주의 선호도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기존 회원국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이는 EU에 가입한 뒤 경제가 더 악화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위기로 인한 타격이 큰 국가일수록 민주주의와 시장에 대한 국민 선호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 EU 회원국에서는 글로벌 금융위기(2009년)와 유럽 경제위기(2010~2011년)를 연이어 겪은 후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사람이 평균 10% 줄어들었다. 반면 유럽 경제위기 여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과거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은 민주주의 선호도가 평균 6% 올랐다. EBRD는 “경제상황의 악화로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극우 테러 비상
경제위기가 부른 또 다른 현상은 반 이민 정서의 확산이다. 이민자 때문에 일자리와 복지 혜택이 줄어든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이 퍼지는 틈을 타 극우 인종주의자들이 끔찍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지난해 7월 노르웨이 연쇄테러로 지구촌이 깜짝 놀란 데 이어 지난달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한 백인 남성이 세네갈 출신 흑인 노점상에게 총을 쏴 2명을 살해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와 나치를 추종하는 신나치주의자가 외국인 등 10명을 연쇄 살해한 사실이 드러났다. 극우 인종주의자들은 주로 외국인의 자국 이민 반대, 인종 차별, 나치 찬양, 반유대주의 등을 주장한다.
강지원기자 stylo@hk.co.kr
■ EU, 해외원조도 자국경제 득실 '주판알' 부터
'민주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대외원조와 분쟁해결에 앞장섰던 유럽연합(EU)이지만 지금은 재정위기에 발목이 묶여 있다. 과거에는 대외 명분을 앞세워 전세계 원조를 주도했지만 지금은 원조보다 그 득실을 먼저 따진다.
EU의 대표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은 지난해 리비아 내전에 적극 개입했다. 재정적자로 고민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2억유로(약 3,600억원), 영국은 2억5,000만파운드(약 4,500억원)를 리비아 공습에 지원해 무아마르 카다피 독재정권의 몰락을 도왔다. 프랑스는 반군 세력인 과도국가위원회(NTC)를 가장 먼저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내정동맹을 체결해 리비아 사태를 진정시킨 일등 공신이 됐다. 프랑스의 적극적 개입에는 평화정착이라는 대외 명분보다 석유개발권 및 재건사업과 관련한 잇속 챙기기 욕심이 깔려있다. 석유매장량이 443억배럴(세계 9위)에 달하는 리비아와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는 석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리비아 반군을 지지한 대가로 리비아 원유의 35%가 프랑스에 할당됐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프랑스 등 EU는 그러나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이란과 시리아 문제에는 소극적이다. EU도 미국처럼 대외적으로는 이란 원유 금수 조치 등 제재안을 논의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EU에게는 이란 제재보다 이란에서 수입하는 하루 45만배럴의 원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란산 석유의 수입 비중이 높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의 반대가 특히 거세 자칫 EU 회원국끼리 갈등에 휩싸일 수도 있다. EU가 수입하는 원유 가운데 이란산은 5.8%(제5위 원유수입국)에 불과하지만 스페인(14.6%), 그리스(14%), 이탈리아(13.1%) 등은 이란산 원유 의존도가 비교적 높다. EU는 아랍통일운동을 주도하고 역내 우방국이 많은 시리아에 대해서도 한발 물러서있다. 어설프게 개입했다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서다.
대외원조도 많이 줄였다. EU는 중국, 브라질, 인도 등 신흥국과 베네수엘라, 칠레 등 고유가 등으로 혜택을 입은 17개국은 2014년부터 원조를 하지 않기로 했다. 토머스 클라우 유럽의회 외교위원회 소속 의원은 "경제위기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유럽이 지출은 줄이면서 대외적 영향력은 키우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강지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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