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무식을 마치고 나오는데 회사 게시판에 벌써 시무식 안내장이 붙어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이지만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덕담을 나누느라 분주했다. 종무식후 퇴근길 지하철은 기록적으로 붐볐다. 사람들은 모두 갈 길을 서둘렀다. 동네 어귀의 한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여기도 어김없이 송년회 모임으로 북적였다. 식당의 어떤 단체손님들은 369게임에 열중이었다. 걸린 사람은 술을 마시는 벌칙을 받았다. 한 사람이 계속 벌칙을 받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빨리 마시라고 재촉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TV는 온통 시상식이었다. 카메라는 화려한 의상을 차려 입은 연예인들을 번갈아 비췄다. 다음 날 아침 인터넷에는 온통 스타들의 옷차림새 관련 기사가 도배될 것이다. 스타들이 한 곳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모습은 송년회 모임의 369게임 소리에 묻혀 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뉴스는 마지막 해넘이를 보려는 혹은 첫 번째 해돋이를 보려는 차량들의 긴 행렬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서해로 넘어간 해가 내일 아침 동해로 떠오르는 것을 끝내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사람들로 서해안과 동해안은 인파로 가득하다고 했다.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문자의 수신을 알렸다. 대부분 단체문자다. 답장을 해야 하나 잠깐 망설인다. 그래도 이름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만 골라 답장을 보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 보며 인사했던 사람에게 온 문자에 또 답장을 보내려니 조금 멋쩍은 느낌이었다. 무시하자니 오해를 받을 것 같고 막상 쓰자니 재미가 없다. 굳이 식상한 인사말을 쓰고 싶진 않지만 결국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로 끝맺는다.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밤 12시까지는 기다렸다.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TV로라도 들어야 비로소 마지막 날의 하루가 마무리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 시간 또한 아이돌 그룹이 점령했다. 아이돌 그룹의 이름과 노래와 춤과 가사와 리듬을 도무지 구별해내지 못하는 아빠를 옆에 앉은 초등학생 아이는 답답해 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곧 보신각 타종식이 시작될 테니. 그런데 카메라는 보신각 현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어린 가수들이 카운트다운을 해치워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보신각 현장을 보여줬다. 종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오랜 기다림은 결국 무산됐다. 배신감에 기분이 불쾌했다.
새해 첫 날은 늦잠을 자고 말았다. 간밤에 별다른 꿈도 꾸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같은 풍경의 아침이었다. 새로운 달력의 첫 장을 떼어냈다. 오늘을 가리키는 숫자를 달력에서 보는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혀왔다. 기껏 1년을 살았는데 또다시 시간은 리셋됐다. 12월 31일까지 꽉 채운 1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달려왔는데 12월 32일도 아니고 13월 1일도 아니고 다시 1월 1일이라니. 이제 내일이면 또 송년회 모임에서 369게임을 하던 사람들도 다시 일터로 돌아가 새해 인사를 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해넘이와 첫 번째 해돋이를 보려고 바다를 찾았던 사람들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이제야 해가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왁자한 분위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밀려온 지난 며칠간의 시간은 묵직한 두통만 남기고 이미 아스라한 과거로 사라졌다. 어찌할 것인가. 새롭게 주어진 이 두툼한 달력을. 새로운 고민이 또 시작되었다.
김한중 EBS 지식채널e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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