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서화숙의 만남] 요리사이자 연극 연출가 김제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서화숙의 만남] 요리사이자 연극 연출가 김제훈

입력
2012.01.01 12:28
0 0

■ "요리로 돈 벌며 하고 싶은 연극 맘껏… 몸은 피곤해도 복받은 거죠"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여러 가지 꿈을 꾼다. 돈을 많이 버는 꿈, 건강해지는 꿈, 성공하는 꿈..이 중에 사람들이 제일 이루고 싶은 꿈은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이 아닐까. 아주 나중이 아니라 바로 지금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스무 평 짜리 작은 극장 키작은소나무(전체 면적은 50평)와 극단 조은컴퍼니 공동대표인 김제훈(36)씨는 요리사이자 연극연출가이다. 요리는 그가 잘하는 것이고 연극은 그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는 '배고픈 직업'인 연극을 마음껏 하고 싶어서 소주방 실내포장마차 선술집 주방에서 일을 한다. 연극평론가 구히서씨는 "경제적으로 쪼들리면 돈이 되는 작품을 고르는데 그는 작품도 아주 훌륭한 것을 내놓는다"고 그를 평한다. 그렇다면 그는 연극도 잘하는 모양이다. 조은컴퍼니의 '아시안스위트'(정의신 작, 김제훈 연출)는 올해 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기금 지원을 받았고 '청춘밴드'(홍영은 작, 조선형 연출)는 올해 문화관광부 지원으로 중국공연까지 다녀왔다. 키작은소나무 극장은 젊은 배우와 작가, 연출가에게 극장을 무료 대관하는 단솔프로젝트도 운영하고 있다. 요리로 돈 벌며 하고 싶은 연극 한다는 그의 이야기.

_요리와 연극, 어느 게 먼저였어요?

"처음에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어요. 고향이 통영인데 엄마가 시민예술회관 아래 쪽에서 자그마한 백반집을 했어요. 저도 음식을 잘했어요. 고3 때 폐결핵으로 1년 휴학을 하면서 양식조리사,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요리사가 되려고 경주대 호텔경영학과에 갔는데 막상 가보니까 대학이 제 생각이랑 많이 달라요. 자퇴하고 군대를 갔어요. 취사병을 했어요. 전남 고흥 단장이라는 데 통신기지가 있어요. 간첩선 잡는. 서른 명 정도가 정원인데 원래 이등병으로 배치가 되면 통신교육을 한달 받고 각자 보직으로 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교육받은 지 두 주쯤 됐을 때 고참 취사병들이 만든 짜장이 국물만 있어서 문제가 됐어요. 상사님이 당장 이등병 데려오라고 해서 그때부터 곧바로 취사병으로 투입이 됐어요. 군대에서는 1식5찬으로 식단도 내려오고 식재료도 다 오거든요. 식단 레시피가 있으니까 많이 배웠어요. 식단이 괜찮으면 그대로 했지만 부실하다 싶으면 식재료에 맞춰서 다른 요리를 했어요. 닭도리탕이 메뉴라도 양념통닭 만들기도 하고. 누나가 함안에서 종묘사를 하니까 호박씨 상추씨를 보내달라고 해서 농사도 지었어요. 군대에는 짬이라고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잖아요. 그걸 땅에 구덩이를 파서 버리거든요. 오래된 구덩이는 썩어서 퇴비가 돼요. 오래된 짬구덩이 옆으로 호박씨를 심었더니 가을이 되니까 늙은 호박이 정말 이만한 게 기지 주변으로 풍년이 들어서 겨울 내내 전 부쳐먹고 호박죽 끓여먹고. 요리법 모르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고. 24개월 동안 제대 전날까지 애들 밥해주고 나왔어요. 제대하고 요리사가 되려고 300만원만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반지하방에서 살면서 아웃백스테이크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해서 1년 반만에 주방매니저로 올라갔지요. 꽤 빠른 거지요. 집도 반지하에서 2층으로 올라가고 저축도 좀 생기고. 제가 욕심이 많아가지고 아침 7시에 나가서 새벽 1시까지 일할 때였어요. 그때 빨간색 마티즈를 타고 다녔는데 2001년 4월쯤인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올림픽대로에서 차가 뒤집혔어요. 길이 꽉 막혀서 다행히 죽지는 않았는데 제가 그 순간, 사는 게 이게 뭔가 그러면서 연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_불현듯?

"네. 그래서 음식점을 관두고 인터넷으로 극단을 알아보니까 그 무렵 극단 로뎀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주연인 '셜리 발렌타인'을 한다면서 단원을 모집하더라고요. 고두심 선생님이랑 한 공연도 있고, 좋은 극단이다 싶어서 단원으로 들어갔어요."

_연극은 잘했습니까?

"경상도 사투리가 문제였어요. 사투리 발성에 신경 쓰다보면 감정에 소홀하고. 지금은 차라리 사투리가 나오더라도 감정을 살리는 걸로 나갔을 텐데. 2002년 2월에 '너츠' , 6월엔가 '오해', 워크숍 공연으로 두 작품을 했는데 매번 대사 때문에 지적을 받았어요. 제가 하상길 대표님한테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우리나라에서 발성이 제일 좋은 사람이 극단 상임연출 하시는 주호성 선생님'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2003년에 주호성 선생님이 교수로 있는 전남과학대 방송영상학과에 입학을 했어요. 교양과목은 전남 곡성에 캠퍼스로 가서 듣지만 실기훈련은 서울에서 받았어요."

_그래서 연기는 많이 늘었습니까?

"2006년 2월에 졸업을 하고 여름에 로뎀이 '너츠'를 올려서 제가 판사 역할을 했는데 대표님께서 좋았다고 했어요. 대표님이 칭찬에 박하신 분인데(웃음). 그런데 대학을 다니면서 연출을 해보니까, 연기로는 잘한다는 소리를 한번도 못 들었는데 연출은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연출로 전환했습니다. 요즘은 다시 연기도 하고 싶네요. 이제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_그 후로 요리는 끊었습니까?

"아니요. 로뎀 극단은 단원이 되면 청소만 해도 다달이 30만원씩 주시고 객석이 꽉 차면 '만원사례'라고 30만원씩을 꼭 더 챙겨주셨어요. 대표님이 진짜 좋은 분이에요. 그래도 아르바이트 해야 살아요.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낙지집에서 주차겸 서빙도 했어요. 여기 사장님이 지금도 저희 극단에서 공연하면 꼭 오세요. 그때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학교 다니고 저녁 7시부터 새벽4시까지 알바 하고. 다시 집에 가서 자고 10시까지 학교 가고."

_어휴, 어떻게 인간이 매일 그렇게 살아요?

"그런가요? 뭐 특별히 힘든지 몰랐어요. 제가 잠이 별로 없고 해야 할 일이면 한다 그런."

_그래서 학교를 졸업하고는 연극만 한 건가요?

"그때도 경양식 겸 호프집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아무래도 돈을 벌어야겠다 싶어서 2006년 겨울에 아예 종로에 소주방을 차렸어요. 연극은 그 다음 해 로뎀이 만든 '안 내놔, 못 내놔'에서 루이지 역을 하고는 못했어요."

_요리는 뭐 잘해요?

"골뱅이무침 완전히 맛있게 해요. 골뱅이무침을 1주일에 세 번을 먹으러 오는 손님이 있었으니까. 숯불닭발 옛날통닭 그런 거가 인기 있었어요. 소주방을 할 때는 돈도 많이 벌었어요."

_돈을 벌면 계속 돈버는 일을 하고 싶을 텐데 왜 연극으로 돌아왔어요?

"연극을 하려고 소주방을 한 거니까요. 소주방을 2년 하고 2009년 2월에는 실내포장마차를 차렸어요. 그것도 종로에 있어서 정릉에 있는 집에서 매일 출근을 하면 여기(극장)를 지나가는데 몇 달 동안 '임대'가 계속 붙어있는 거예요. 빨래방 지하에 세탁기 놓던 창고인데 잘하면 극장이 하나 나오겠어요. 로뎀에 같이 있던, 조선형이라고 요즘 (KBS) 아침드라마 '복희누나'에서 사채업자 역할 하는 배우가 있어요. 선형이하고 둘이 돈을 모아서 극장으로 만들었어요. 6월에 계약했는데 석달만에 다 완성했으니까. 돈이요? 많이 들어갔지요. 보통 이런 소극장에는 전기를 30킬로와트만 넣어도 된다고 하는데 저희는 60킬로 넣고. 아직도 빚 다 못 갚았어요."

_실내포차는 그만 두고요?

"거기서 돈을 벌어야 극장이 되니까 그것도 계속 했지요. 극장 일 끝나면 포차 가서 새벽 네 다섯시까지 주방 일하고. 올 2월에 그만 뒀어요. 권리금 받은 건 극장 빚 갚는데 썼어요."

_차 사고 만나서 불현듯 연극이 하고 싶었다는 시작 치고는 너무 열심인 거 아니에요?

"글쎄요. 그런가요?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음…아, 맞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 학예회에서 연극을 했어요. 어, 말하다보니 생각이 나네요. 전교생 가운데 뽑아서 했는데 그때 어린이용 창작희곡전집도 다 찾아보고. 왜 이걸 잊고 있었을까."

_그때부터 연극을 할 생각은 안 한 거예요?

"제가 모범생으로 살려고 굉장히 애를 썼어요."

_네?

"아버지가 딴집 살림을 차리셔서 엄마가 밥집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갔어요. 제가 엄마의 생활력을 닮았나 봐요. 어렸을 때 엄마가 가방을 두 번 싼 적이 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인데 엄마가 '내가 이대로는 못 살겠다' 혼자말처럼 그런 건 기억이 나는데 그때 제가 '엄마보다 못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그랬대요. 제가 요즘 힘들다고 하니까 엄마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만일 네가 그 말을 안 했으면 나는 지금 세상에 없다' 그러시지요. 힘들어도 힘내라, 그런 말씀이지요. 그때 배다른 형이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좁은 동네니까 학교에서도 다 알아요. 그래서 정말 남한테 손가락질 받는 행동은 안 해야겠다 늘 조심하고."

_엄마를 생각해서 공부만 하고 엄마를 도와드리면서 요리사가 될 꿈을 꿨다, 이런 건가요?

"에이, 그러면 너무 미화하는 거고요. 그런 거는 아니고. 아버지가 너무 밉고 부끄럽고 늘 마음이 복잡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한테 이 이야기를 처음 털어놓으면서야 부끄러움을 털어버렸어요. 예술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이런 상처들이 하나씩은 있어요. 저도 그래서 연극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지요."

_재일동포 작가 정의신씨와 인연이 각별해 보이네요.

"2009년에 극장을 만들면서 홍영은씨가 상임작가로 합류했어요. 키작은소나무 개관기념작인 '그냥 청춘'도 홍영은씨가 쓴 거지요. 제가 계속 홍영은씨 작품만 하니까 '다른 사람 작품도 해보는 게 연출가로 폭을 넓힐 기회'라면서 정의신 선생님의 '겨울선인장'을 가져왔어요. 알고 보니 이 분 희곡집이 나와 있는데 거기 실린 6편이 다 좋았어요.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면서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2010년 봄이었는데 수소문을 했더니 마침 한국에서 '바케레타'를 공연하고 계셨어요. 그래서 극장으로 초대를 했더니 와서 '그냥 청춘'을 보시고는 당신 작품을 하라고 허락해주셨어요. 2010년에 '겨울 선인장', 2011년에 '아시안 스위트'를 올렸어요. 둘다 국내초연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대단한 작가를 이렇게 조그만 극장(80석)이 모셨냐고 하는데 별 비결 없어요. 작품료도 정말 조금 받으시고. 정말 고마우신 분이에요."

_연출가로 가장 신경쓰는 것이라면?

"일상 속에서 흔하게 존재하지만 쉽게 느끼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일상의 웃음과 행복을 관객들에게 전해주는 연극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골목길의 풍경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그런 공연."

_그럼 이제 요리는 끝인가요?

"극장 운영하려면 계속 해야 돼요. 통영 친구랑 2월에 대학로에서 선술집을 열어요."

-돈의 구애를 안 받는다면 연극만 하고 싶어요?

"그렇지요. 돈만 있다면 200석 정도, 무대가 깊은 그런 극장 하나 짓고 연극만 하고 싶지요. 그런데 저는 편해지면 안 되는 팔자인가 봐요.(웃음) 그래도 요리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싫지 않으니까, 어, 생각해보니 이것도 복이네요."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