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국의 멋을 폭넓게 창조하고 멋으로 세상을 살아간 참으로 귀한 예술가였다. 내가 굳이 그를 화백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그의 사색과 예술가적 폭이 그렇게 매우 넓기 때문이다.”
김환기(1913~1974) 화백과 절친했던 최순우(1916~1984)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김 화백의 타계 소식을 듣고 이같이 회상했다.
180cm의 껑충한 키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김 화백은 지우를 만날 때면 만면에 웃음을 띠었지만 캔버스 앞에선 늘 진지한 구도자였다. 하루 16시간을 기도하듯 혹은 속죄하듯 거대한 캔버스에 몸을 숙여 수 천 개의 작은 점과 네모 칸을 그려낸 탓에 종종 극심한 척추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우주를 형상한 것 같기도 하고 추상적 종교화 같기도 한 그의 점묘추상화 앞에 서면 어쩐지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
탄생 99주년을 맞은 김환기 화백의 대규모 회고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6일부터 열린다. 2004년 이후 8년 만의 회고전이자 1930년대부터 1974년 작고 직전까지의 유화 명작 64점을 시대별로 구성했다. ‘메아리’(1964), ‘귀로’(1950년대), ‘항아리와 꽃가지’(1957), ‘무제’(1964-65) 등 5,60년대 미공개 작 4점도 나온다.
그는 드물게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며 한국적이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후기에는 점묘 추상을 완성했지만 초기 구상화에서는 백자 항아리, 달, 산, 매화, 새, 여인 등 한국적인 소재를 다뤘다. 줄곧 캔버스를 뒤덮은 옅고 짙은 다양한 파란색 역시 한국의 멋에 닿아 있다. 파리 유학 시절 프랑스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의 하늘과 동해 바다는 푸르고 맑으며 이런 나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글에서도 “파리라는 국제 경기장에 나서니 우리 하늘이 역력히 보였고 우리의 노래가 강력히 들려왔다.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 자격으로 참석하면서 뉴욕에 건너간 그는 타계 순간까지 11년간 그 곳에 머물렀다. 1970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제1회 한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절정기를 맞았지만 1974년 7월 뇌출혈로 갑작스럽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푸른색에서 회청색으로 변해가는 생애 마지막 작품을 보면 그는 또다시 새로운 작풍을 실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전시는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시대별로 구성됐다. 본관 1, 2층에 이어 신관 1, 2층, 지하 1층 순으로 보면 그의 시대별 작풍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2월 16일까지. (02)2287-3500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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