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백만원 월급엔 꼬박꼬박 세금… 주식투자 10억 차익엔 '0원'
수조 원의 상장주식을 보유한 재벌 오너가 지분 일부를 처분해 1,000억원의 차익을 얻었다면 세금을 얼마나 낼까. 양도소득세율 20%(지분 3% 또는 100억원 이상 보유 대주주만)가 적용돼 800억원이 고스란히 수중에 떨어진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574억7,000만원의 현금 배당을 받았다. 주주의 배당소득에는 15.4%의 소득세가 부과된다. 골동품을 매입했다 처분해 10억, 100억원의 양도차익을 거둬도 단 한 푼의 세금을 내지 않는다.
반면 지난해 1억1,000만원의 연봉을 받은 대기업 임원 B씨는 현행 소득세법상 최고 세율 구간인 과표 8,800만원이 넘어 소득의 35%를 세금으로 떼인다. 이러니 세금에 대한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유리지갑'의 대표주자 월급쟁이는 물론, 중소 상공인이나 세금을 거의 안내는 개미 투자자조차 "부자들 세금이 너무 적다"고 불만이다.
결국 정치권도 부자에게 유리한 세금체계를 고치겠다고 나섰다. 작년 하반기 정치권을 뜨겁게 달군 자본이득세 신설 논란은 올해 총선과 대선의 주요 화두가 될 전망이다. 말로만 끝나는 듯 했던 '한국형 버핏세'는 막판 기사회생했지만 여전히 논란이 진행 중이다. 소득 양극화를 오히려 키우는 불합리한 세금체계에 대해 서로 다른 처지의 3가지 목소리를 들어봤다.
◆프리랜서로 독립한 펀드매니저 A(48)씨
"표를 얻기 위한 자본이득세 도입에는 절대 반대입니다."
연금기관에서 15년 이상 펀드매니저로 일하다 최근 독립 투자법인을 차린 A씨는 자본이득세 신설 주장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역대 연봉을 받던 펀드매니저 시절 근로소득세 35%를 내다가, 지금은 법인세 등을 포함한 26% 수준으로 세율이 낮아진 경우.
그는 "자본이득세가 불러올 각종 부작용이 우려되는 것일 뿐, 세금이 오를까 걱정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적금으로 모은 목돈을 주식에 투자하는 월급쟁이에게 자본이득세를 걷는다면 이미 낸 근로소득세와 예금 이자소득세에 더해 이중과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주식 양도차익 과세로 행여 금융시장이 위축되면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등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후폭풍이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A씨는 "세원(稅源) 확대라는 이상은 좋지만 결국 세무사 등을 고용해 빠져나갈 수 있는 자본가만 유리해지고, 대다수 개미 투자자들은 세부담만 늘거나 탈세시도가 적발돼 범법자가 될 수 있다"며 "세수를 확대하려면 우선 탈세를 줄이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억대 연봉자 대기업 임원 B(50)씨
"세금은 최대한 공평하게 거둬야죠."
직장 생활 22년차인 대기업 임원 B씨의 연봉은 약 1억1,000만원. 그런데 소득세 최고 세율인 35%를 떼니 월 수령액은 710만원 정도다. 교육비, 생활비 등으로 쓰고 나면 월 수십 만원 저축하기도 쉽지 않다. 그는 "남들이 억대 연봉자라고 부러워하지만, 소득에 비해 세율이 너무 높아 노후대비 저축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며 "연봉이 최소 수십 억원인 CEO나 등기임원 등과 같은 세율을 적용 받는 건 심정적으로 잘 동의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봉급 생활자들의 박탈감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이득에 반드시 과세하되, 그 대상은 연 소득 10억원이 넘는 전문투자자에 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득세제도 손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비록 16년간 고정됐던 최고세율(과표 8,800만원 초과 35%)이 한 단계(3억원 초과 38%) 더 세분화됐지만 이를 더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B씨는 "나와 벌이가 비슷한 변호사나 치과의사 친구들이 세금은 훨씬 적게 내는 걸 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많은 것 같다"며 "복지 향상을 위해 증세는 필요하겠지만, 정부가 숨겨진 세원을 찾아내고 투명하게 걷는 노력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순수 전업투자자 C(40)씨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는 건 당연하지만,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죠."
2005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투자자로 나선 C씨. 그는 초기자금 2억4,000만원을 98억원까지 불린 이른바 '슈퍼개미'다. 그는 몇 가지 보완책 마련을 전제로 자본이득세 신설에 찬성했다.
우선 투자 이득에 대한 과세는 당연하지만, 투자 손실을 봤을 때도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가령 지난해 10억원 손실을 보고 올해 5억원 이익을 봤다면 세금을 얼마나 깎아줄 건지, 올해 미처 감면해주지 못한 손실분은 최대 몇 년까지 이월되는지 등에 대해 현실적인 묘수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고 판 가격의 차액을 과세 근거로 삼기 때문에 조세 당국이 하루에도 수십만 건 이상 이뤄지는 주식거래 정보를 장기간 관리해야 하는 부담도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C씨는 "1년에 50억원을 5번 순환시키면 250억원어치 주식을 거래하는데, 이익과 상관없이 내는 세금만 7,500만원"이라며 "투자 이득에 대한 과세는 하되, 세금 때문에 주식 거래가 위축돼 주가 폭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밀한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 자본이득세의 딜레마
주식투자 등 자본이득에 대한 느슨한 과세는 '불로(不勞)소득에 특혜까지 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눈총을 받아왔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소득세제 개편에 앞서 자본이득 과세 문제를 살펴봐야 한다"고 나선 것도 이런 여론을 의식한 결과다. 하지만 일각에선 당장 현실화하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지적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자본시장 위축 우려다.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비과세 정책이 애초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 전략적으로 추진됐던 만큼, 갑자기 이를 거둬들이면 소탐대실(小貪大失)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국내 주식의 30%를 보유한 외국인들이 발길을 돌리는 것을 시작으로 국내 증시의 투자매력이 줄어들면 자칫 한국 자본시장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는 걱정이 적지 않다.
오래 전부터 자본이득에 과세해 온 대다수 선진국들과의 단순 비교는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우리처럼 비과세 체계를 유지하다 과세 전환에 성공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 대만은 과세안을 전격 도입했다가 증시 폭락으로 1년 만에 철회하기도 했다. 여기에 ▦세수 변화 예측의 어려움 ▦기존 거래세와의 충돌에 따른 이중과세 문제도 현실적인 장애물로 꼽힌다.
물론 과세의 불가피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훨씬 많다. 증권업계 내부에서조차 "자본시장은 세금보다 경제의 기초체력에 좌우된다"며 과도한 세금 공포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신중하고 점진적인 도입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조세연구원은 "국내 자본시장의 성숙도나 조세 형평성 문제를 감안할 때 이제 남은 과제는 어떻게 과세안을 도입할까 하는 방법론"이라며 "일본의 선례를 교훈 삼아 단계적이고 정교한 시행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세금 한푼 안내는 종교계·미술품… 논란의 불씨 여전
엄청난 소득이 있어도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은? 종교인이다. 우리나라는 종교인이 세금을 안 내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나라다. 소득세법상 종교인과 종교단체는 과세도 비과세 대상도 아닌 사각지대로 남아있고, 과세당국은 관행적으로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 여러 차례 사회적 논란이 됐지만, 명확한 유권해석조차 미루고 있는 상태다. 김재진 한국조세연구원 세법연구팀장은 "과세하는 게 맞지만 반발이 크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개신교 등 종교계의 전통적인 비과세 논리는 "종교인의 신념에 따른 봉사나 헌신을 일반인의 근로처럼 과세대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이들 역시 소속단체에서 월급을 받는 만큼 과세해야 마땅하다"는 비종교계의 요구도 끊이지 않는다. 실제 천주교는 '신도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는 차원에서 1994년부터 신부, 수녀에게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고 있다.
고소득층의 재테크 수단으로 애용되는 미술품도 비과세 우산을 쓰고 있다. 20년 넘게 과세 필요성만 제기되다 2008년 말 소득세법 개정을 통해 올해부터 1점당 6,000만원이 넘는 국내ㆍ외 미술품(국내 생존 작가는 제외)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할 예정이었으나 작년 말 법이 재개정돼 2013년까지 시행이 미뤄진 상태다. 거래 위축을 우려하는 미술계가 미술품 가치를 산출하는 방법이나 매매 신고ㆍ검증 등 기반 미비 등을 이유로 강력 반대했기 때문이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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