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후방 지역 한 말단 군 부대의 상황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군 최고 지휘관이 상황병 근무 상태를 점검하려고 한밤중에 비상전화로 상황실에 전화를 걸었다. "나, 총장이야"라는 첫 마디에 "장난치지 마. 니가 총장이면 나는 대통령이다, 임마"라는 답이 돌아왔다. 정말 총장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상황병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시간에 총장이 말단 부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오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 당연했다. 나중에 상급부대에서 조사를 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처벌하지 않고 넘어갔다.
■ 19일 김문수 경기지사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남양주소방서에 119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를 받은 상황 근무자의 생각도 비슷했을 것 같다. 김 지사가 "도지사 김문수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혔지만 정말 도지사가 전화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늘 장난전화에 시달리는 119 상황 근무자들이기도 하다. 이 근무자는 거듭 도지사라고 말하는 김 지사에게 "여보세요" "무슨 일인지 말씀하세요"를 연발하다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김 지사가 다시 건 119 전화를 받은 다른 근무자도 이름은 밝혔지만 역시 장난 전화로 판단한 듯했다.
■ 김 지사는 이 얘기를 도 소방재난본부에 알렸고, 두 상황실 근무자는 다른 지역 소방서로 전보조치됐다. 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김 지사는 어제 전보 조치 철회를 지시했으나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 두 근무자의 전보 사유는 상황 근무자가 먼저 직위와 이름을 밝혀야 하는 근무수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보다는 괘씸죄가 적용됐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제를 삼아야 한다면 노인요양원을 방문해 중형 구급차 이용 시스템을 점검하겠다며 긴급 비상 전화인 119를 사용한 김 지사의 부적절한 행동이 먼저다.
■ 오바마 대통령과 미 해병대 출신 다코타 마이어 예비역 병장 얘기와 비교되기도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간 전 혁혁한 전공으로 훈장을 받게 된 마이어 병장과 통화 요청을 했다가 근무 중이니 점심시간에 전화하라고 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이어 병장의 당당함 못지않게 오바마 대통령의 자세가 인상 깊다. 그에 비하면 김 지사는 너무 권위적이다. 문제의 119 녹음을 들어보면 바로 자신을 알아보고 응당한 예우를 하지 않는 근무자의 태도에 황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친서민 행보에 누구보다 열심이지만 정작 권위의식에 절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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