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언젠가부터 눈으로 바뀌었다. 외투깃을 단단히 여며보지만 찬바람을 튕겨내기에는 역부족인 일본 북부의 겨울. 뜨끈한 온천과 달짝지근한 사케가 간절할 터. 하지만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靑森)현의 겨울 여행에서만큼은 온천도 사케도 잠시 미뤄두는 게 좋다. 오감은 물론 정신까지 맑게 씻어주는 일본의 대표 트레킹 코스, 오이라세(奧入瀨) 계류가 있기 때문이다.
눈과 귀, 코마저 즐거운 트레킹
오이라세 계류의 여름은 푸르디 푸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 나오는 숲이나 '아바타'의 나비족이 사는 판도라를 떠올리면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 숲'이라는 아오모리의 지명 그대로다.
하지만 잎이 떨어진 겨울이라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6월의 녹음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띄엄띄엄 쌓인 눈 사이로 드러나는 초록이 더 짙푸르다. 낙엽이 져 나무들은 앙상하지만 산책로 양 옆으로 빼곡한 고사리, 물길을 쪼개는 바위와 쓰러진 고목 위에 낀 이끼들이 초록빛 생명력을 내뿜는다. 앙상해진 나무 덕에 가을까진 볼 수 없었던 숨은 폭포를 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원시림인 이 곳은 급류와 폭포가 일품이다. 오이라세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여울이 많아진다'는 뜻. 계류의 총 연장 80㎞ 중 14.2㎞가 산책로로 개방돼 있는데, 조용한 숲을 2시간 가량 걷다 보면 지옥문을 연상케 하는 '아수라 급류'를 만나게 된다. 오이라세 계류 중 물살이 가장 센 구간으로 푸른 물과 흰 물보라, 초록의 이끼가 조화를 이뤄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낸다. 이 곳을 기점으로 숲에 사로잡혔던 시선은 물줄기로 향한다.
아수라 급류에서 10분 남짓 걸으면 첫 폭포인 지스지노타키 폭포가 있다. 코스에 펼쳐져 있는 14개의 폭포 중 낙차가 30m 이상인 가장 높은 폭포다. 모든 폭포와 급류에는 그 모습과 특징에 따라 이름이 붙어 있다. 2단으로 꺾이며 용소로 호쾌하게 떨어지는 구모이노타키 폭포,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람에 흩날리며 비단실을 연상케 하는 시라이토노타키 폭포, 계단처럼 생긴 바위 위를 흘러내리는 구단노타키 폭포, 본류에 있으면서 수량이 풍부해 '물고기가 멈추는 폭포'로 불리는 조시오타키 폭포 등이 대표적인 볼거리다.
설경에 시선을 뺏기고 청량한 폭포수 소리에 귀가 트인다. 시각과 청각의 즐거움이 강렬해 놓칠 수도 있지만 산책로가 끝날 때까지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월계수 향은 이 곳의 숨은 미덕이다. 계류의 높낮이 차가 200m 밖에 되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으며, 버스로도 오이라세 계류의 경치를 관람할 수 있다. 눈사태로 물길이 바뀌고 고목이 쓰러져도 인위적으로 복원하기보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 보존한 것도 오이라세 계류만의 특색이다.
호반에서 즐기는 불꽃놀이
4시간의 트레킹 코스를 완주하면 드넓은 수평선이 펼쳐진다. 오이라세 계류의 수원(水源)인 도와다 호수다. 화산 분화로 생긴 칼데라호인데 둥그런 모양의 일반적인 호수와 달리 반도 2개가 돌출돼 있다. 두 번의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이중식 칼데라호이기 때문. 둘레가 46㎞(백두산 천지의 3배가 넘는다), 수심이 327m인 이 거대한 호수는 투명하기 이를 데 없다. 호숫가에는 산책로가 정비돼 있으며, 4개의 전망 포인트마다 전망대가 마련돼 있어 다양한 각도에서 도와다 호수의 설경을 만끽할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떠나는 50분 여정의 호상 유람은 지상에서 보는 경치와는 또 다른 흥취를 선사한다. 겨울이 아니라면 카누도 탈 수 있다.
소녀상은 도와다 호수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일본의 대표 예술가인 다카무라 고타로가 조각한 작품으로 벌거벗은 두 소녀가 손바닥을 마주 대고 있는 형상인데, 실은 한 소녀가 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한눈에 반해 결혼한 아내 치에코를 모델로 삼았으며, 거울처럼 맑고 소녀처럼 다소곳한 도와다 호수의 느낌을 표현한 작품이다.
겨울의 도와다 호수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도와다호의 겨울 이야기'. 1월 하순부터 주말마다 펼쳐지는 축제다. 일본 전통 악기인 츠가루와 샤미센 공연, 향토예능경연대회와 떡방아 대회 등이 열린다. 따끈한 사케 잔을 기울이며 눈과 호수를 배경으로 즐길 수 있는 불꽃놀이는 단연 압권이다.
일본식 불고기 바라야끼, 그리고 혼탕
트레킹도 즐겼고 호반 산책도 마쳤다면 이젠 주린 배를 채울 차례다. 아오모리 지역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바라야끼는 고급이라고 할 순 없지만 비싸지 않은 가격에 맛도 좋아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메뉴다. 기름기 많은 우삼겹과 숭덩숭덩 썬 양파를 간장 소스에 재 뒀다가 철판에 구워 먹는데, 맛은 한마디로 짭조름한 불고기다.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니 그럴 수밖에.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아오모리는 해산물도 유명하다. 밥 따로 회 따로 사서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비벼 먹는 놋케동은 한국식 회덮밥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회는 물론이고 가리비나 새우, 연어 알, 날치 알 등 각자 원하는 해산물을 골라 먹을 수 있다.
또한 아오리 사과의 고향인 아오모리는 일본의 대표 사과 산지다. 대형 마트나 특산물 전시장, 공항 면세점에서 파이, 케이크, 주스, 술 등 사과로 만든 먹거리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배까지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남은 건 온천뿐. 온천 많기로 일본에서 4위인 아오모리에는 다양한 온천들이 있다. 그 중 미사와에 있는 고마키 온천 아오모리야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온천이다. 20만평 규모의 부지에 깔끔하게 꾸민 현대식 온천으로, 노천탕 '우키유'에서는 잘 가꿔진 정원을 바라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도 있다. 노천탕 바로 앞에 있는 단풍 나무는 눈 덮인 12월에도 붉은 잎이 풍성하다. 관내에서는 한국어로도 메뉴가 적힌 뷔페와 아오모리현의 대표 여름 축제인 네부타 축제를 재연하는 공연도 즐길 수 있다.
아오모리시 핫코다산 중턱에 위치한 스카유 온천은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목조 온천이다. 재미있는 것은 혼탕이라는 점. 탈의실을 벗어나면 남녀가 같은 욕탕에 몸을 담근다. 하지만 욕장 안이 증기로 가득한데다 수질이 뿌연 산성유황천이기 때문에 잘 안 보인다. 게다가 욕조 중앙에 좌우로 남녀 표식이 있어 칸막이만 없을 뿐 성별이 구분되는 셈이다.
혹시 방사능 걱정으로 아오모리 여행을 주저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수돗물과 해수, 농수산물의 방사능 수치를 현청 홈페이지에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가장 최근 조사일인 12월 초 현재 각 항목의 방사능 수치는 '검출 안됨'이다. 도호쿠 대지진 이후 휴항했던 대한항공의 인천-아오모리 직항 노선은 10월 31일부터 재개돼 주 3회 운항한다.
아오모리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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