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말이 말을 낳고 또 다른 말이 보태지는 말들의 성찬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도 권력과 그 언저리를 떨게 한 것은 "쫄지마, 씨바" ( '나는 꼼수다' ) 단 두 마디였다. 바깥으로 눈을 돌려도 2011년을 진동케 한 건 "점령하라(Occupy)!" 혹은 "잡았다(We got him)" 같은 간결하고 선동적인 감성의 언어였다. 구구절절 옳은 얘기보다 임팩트 있는 말 한마디가 "사실상 승리" 를 거둔 한 해. 촌철살인에서 실언까지, 올 한 해 인구에 회자되고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말들을 분야별로 짚어봤다.
■ 정치/ 박근혜, 안철수 돌풍 묻자 "병걸리셨어요?"
올가을 '안철수 현상' 이 정치권을 강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9월 8일 특별방송좌담회에서 이를 두고 " '우리 정치권에 올 것이 왔다' 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 이어 "스마트시대가 왔는데 정치는 아날로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 며 변화의 기회로 삼자고 촉구했다.
정치권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는 9월 2일 충북에서 열린 의원 연찬회에서 "철수가 나오면 조금 있다가 영희가 나오겠네" 라고 비꼬았고, 박근혜 전 대표는 9월 7일 인천을 방문한 자리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지지율 상승에 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는 "병 걸리셨어요?" 라고 대꾸해 논란을 빚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전 대표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부추겨서 망가뜨리는 것은 안타깝지만, 본인도 간이 배 밖으로 나오고 있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원장은 9월 4일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현재의 집권 세력" 이라며 "(한나라당이) 이번 보선을 통해 응징을 당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고 말해 서울시장 보선 출마에 무게를 실었으나, 이틀 뒤 박원순 현 시장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그는 투표일 직전 박원순 후보 지지 편지에서 "선거 참여야말로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길" 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권 도전에 대해 줄곧 "가당치도 않다. 생각해볼 여유도 없다" 고 말해왔으나, 재산 기부 등으로 더 주목을 받으며 여전히 유력한 대선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홍준표 전 대표의 잇단 실언도 도마에 올랐다. 개표조차 무산된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두고 "사실상 승리한 게임" 이라고 한 그의 발언으로 인터넷 등에는 한동안 '사실상 ○○' 라는 패러디가 넘쳤다. 그는 여당이 패배한 10·26 재보선 결과에 대해서도 "이겼다고 졌다고도 할 수 없다. 결국 노사이드(무승부)다" 고 말해 입방아에 올랐다.
여야 모두 사실상 패배한 재보선 후폭풍은 거셌다. 진통 끝에 중책을 떠맡은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한나라당을 뼛속까지 바꿔야 한다" , "저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민만 보고 가겠다" 고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전당대회에서 야권통합을 의결한 다음 날 "야권 통합을 베고 누워 죽는 심정으로 통합을 완수하겠다" 고 의지를 다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국회 처리를 둘러싸고도 날 선 공방이 오갔다. 민주통합당 정동영 의원은 국회 처리를 요구하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외교부의 치명적인 약점은 매사를 워싱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이라며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모르겠다. 옷만 입은 이완용인지 모르겠다" 고 공격했다. 김 본부장은 이에 맞서 "정 의원이 정부에 계실 때 제가 (미국과) 협상하는 과정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늦었지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면서 참여정부 당시 정 의원의 한미 FTA 지지 사실을 우회적으로 꼬집었다.
■ 사회/ 협찬인생… 가카의 빅엿… 도가니 등 회자
올해 한국 사회를 강타한 최고 유행어는 "쫄지마, 씨바" "가카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였다. 600만명이 다운받아 듣는 정치 풍자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 는 권력을 향해 어퍼컷을 날릴 때마다 이 말을 외쳤다. 일각에선 욕설 섞인 선동에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현 정부 들어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여러 조치에 반감을 갖고 있던 서민과 젊은이들은 주눅들지 말고 정치적 의사표현을 명확히 하자는 말에 호응했다.
영화 '도가니' 의 배경인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2005년 처음 폭로했던 최사문 교사는 "일반 학교였다면 과연 7년이나 흘렀을까" 라며 뒤늦은 진상 규명 움직임에 아쉬워했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쓴 공지영씨는 "인화학교뿐만 아니라 상류층이 형성하는 침묵의 카르텔을 고발하고 싶었다" 고 말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 시장은 다음 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권이 자신을 '협찬 인생' 으로 몰아붙인 것에 빗대 "제가 안철수 원장을 비롯해 야권, 그리고 온 세상의 협찬을 얻었지 않았느냐. 마지막으로 언론의 협찬도 얻겠다" 고 말했다. 서울시 간부들과의 상견례에서도 "제가 뿔이 하나 달린 사람은 아니죠" 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반면 "복지포퓰리즘과의 전쟁" 을 선포한 오세훈 전 시장은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통과되지 않으면 시장 직을 내놓겠다며 "저 오세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해도 후회는 없다" 고 했지만, 결국 시민의 뇌리에서 사라진 신세가 됐다.
1년 가까이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지난달 10일 땅에 내려온 김진숙 민노총 지도위원은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309일 만에 처음이다.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은 매운탕" 이라는 말로 기쁨을 표시했다.
일본군위안부 진상규명과 배상을 촉구하며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가 최근 1,000회를 맞았다. 피해자 김복동(85) 할머니는 "처음엔 '그냥 몇 번 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나갔지. 20년이나 이어지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고 말했다.
판사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언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인천지법 최은배 부장판사가 11월 22일 한미 FTA 국회 비준 직후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었다" 고 올린 것이 발단. 양승태 대법원장이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 는 옛말을 인용해 에둘러 자제를 촉구했지만, 판사들의 동조가 줄을 이었다. 서울 북부지법 서기호 판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SNS 심의와 관련 트위터에 "오늘부터 SNS 검열 시작이라죠? 방통위는 나의 트윗을 적극 심의하라. … 쫄면 시켰다가는 가카의 빅엿까지 먹게 되니" 라는 글을 올려 조롱하기도 했다.
조현오 경찰청장은 10월 인천 조직폭력배 난투극 사건과 관련, "두렵다고 뒤꽁무니를 빼면 경찰이냐" 며 막무가내로 질타해 일선경찰의 불만을 샀다. 당시 현장지휘 팀장은 "조폭들 앞에서 꽁무니 빼는 비굴한 경찰 아니다. 나와 우리 팀원들은 목숨을 걸었던 강력팀 형사" 라며 억울해했다.
■ 경제/ "고용 대박" 재정부 장관 발언에 부글부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금융권의 탐욕은 국내서도 뜨거운 이슈였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10월 12일 "금융권은 과도한 탐욕과 도덕적 해이를 버리라" 고 질타하며, "더 이상 국민에게 손 벌리지 말라" "소외계층부터 외면하는 은행은 필요없다" 등 강성 발언을 이어갔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은 7월 취임 1주년 간담회에서 'MB 낙하산' 이란 세간의 시선에 대해 "(내가)뭐가 부족한가, 못난 고대 나와서 그러나" 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어 "고심 끝에 이 자리에 왔는데 '아마쿠다리(天下り·낙하산)' 라며 욕을 먹었다" 고도 했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10월 금융당국의 카드 수수료 인하 압박과 관련 자신의 트위터에 "젖소목장이 있는데 우유 판매(가맹점수수료)는 적자라서 정작 소 사고파는 일(대출사업)이 주업이 되었다. 그런데 소 장사로 돈을 버니 우유 값을 더 낮추란다" 라고 올려 불만을 토로했다.
경제관료들의 실언, 식언(食言)도 이어졌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10월 고용통계에서 취업자수가 올 들어 최고치인 50만명 이상 늘어난 것을 두고 "고용 대박" 이라고 했다가 곤욕을 치른 뒤 "제가 잠시 귀신에 홀렸던 것 같다" 며 사과했다.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 장관은 1월 전세안정대책을 발표하며 "더 이상의 전세대책은 없다" 고 밝혔으나, 이후 7차례나 부동산대책을 내놓았다. '유가와의 전쟁' 에 앞장 선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내가 회계사 출신이다. (회계사무소를) 단기 개업하는 마음으로 직접 기름원가 계산을 해보겠다" 고 자신감을 표시했지만, 끝내 기름값을 떨어뜨리는 데는 실패했다.
업계의 화두는 변화와 혁신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내부 감사에서 일부 계열사 비리가 적발되자 "과거 10년간 한국이 조금 잘되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고 개탄했다. 스마트폰 시장에선 애플과 삼성전자 간 특허전쟁이 치열했다. 삼성전자 신종균 무선사업부 사장은 "애플에 당한 만큼 갚아주겠다" 는 거친 말도 서슴지 않았다.
■ 국제/ 빈라덴 사살 소식에 오바마 "정의 실현됐다"
9월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 뉴욕 월가에서 소득 상위 1%가 과실을 독점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시위대가 등장했다. 이른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는 "우리는 99%다. 1%가 모든 것을 차지했다" 는 짧고 강렬한 구호로 공감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됐다.
미국의 백만장자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앞서 8월 뉴욕타임스에 "내게 적용되는 세율이 비서의 세율보다 낮다" 며 "나 같은 부자로부터 세금을 더 거둬라" 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어 부자 증세 논쟁에 불을 붙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 5월 1일 미국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자 발표석상에서 "그를 잡았다" 고 말을 뗀 뒤 "이제 정의가 실현됐다" 고 선언했다. "모든 국민이 나를 사랑한다" 고 호언장담하던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10월 시민군에 의해 사살되기 직전 "쏘지마" 라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창업자는 10월 5일 췌장암으로 숨지기 직전 아내와 아이들을 차례로 바라본 뒤 "오, 와우" 라고 세 번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창업자 빌 게이츠는 생전 잡스가 즐겨 쓰던 표현을 빌려 "그와 함께 일한 것은 미치도록(insanely) 대단한 명예였다" 고 애도했다.
유명인사들의 실언도 화제였다. 원조교제와 각종 성추문으로 전 세계를 경악시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는 법정에서조차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이 남자와 하는 것보다 낫다" 고 말했다. 또 친구와 통화 중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해 "성적 매력 없는 비계덩어리" 라고 말한 사실이 경찰의 감청 결과 드러났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경제위기 대책을 논의한 10월 유럽 정상회의에서 비유로존인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론 총리에게 "유로문제에 대해선 좀 닥치고 있어라" 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7월 발생한 노르웨이 연쇄 테러의 희생자 77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는 "우리는 함께 증오를 극복했다" 며 관용과 공동체의식을 강조해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 문화·스포츠/ '00되기 어렵지 않아요' 최효종표 풍자 인기
올해 TV 예능의 최고 히트상품인 MBC '나는 가수다' 는 숱한 패러디를 낳았다. 김어준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 김미화의 '나는 꼽사리다' 처럼 유사 제목을 양산했다.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는 각성의 주문인 듯 '나는 엄마다' '나는 부동산중개인이다' 같은 '나는 ○○다' 시리즈가 이어졌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베스트셀러 도 '~니까 ~다' 라는 유사 제목들을 유행시켰다.
구설도 이어졌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6월 한 토론회에서 종합편성(종편)채널을 갓난아기에 비유하며 "걸음마 단계까지는 보살펴 줘야 한다" 고 말해 '종편의 보모' '종편의 시중' 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는 9월 '기독자유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며 "양주 안 먹고 한국 소주만 먹어도 등록금 다 해결할 수 있다" "경제 문제를 경제적 논리로 푸는 것보다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가치에서 접근을 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라는 엉뚱한 발언을 해 뭇매를 맞았다. 민주당 대표실 도청 연루 의혹을 받아온 KBS는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도청은 없었다' 는 성명을 내 오히려 불신을 더했다.
시사코미디의 촌철살인 풍자와 드라마의 명대사도 넘쳐났다. 팍팍한 현실을 '○○되기 어렵지 않아요~' 란 말로 풍자한 KBS '개그콘서트' 의 최효종은 무소속 강용석 의원의 집단모욕죄 고소로 되레 인기가 치솟았다. 개그콘서트 비상대책위원회 코너의 "야, 안 돼~" , 애정남 코너의 "참 애매합니다잉~" 도 관심을 모았다. SBS '시크릿 가든' 에서 현빈의 대사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나 "이태리 장인이 한땀한땀…" , '뿌리깊은 나무' 에서 세종 역의 한석규가 내뱉은 "우라질" 같은 말들도 인구에 회자됐다.
스포츠계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로 들떴다. 김진선 조직위원장은 7월 남아공 더반에서 평창이 개최지로 확정되자 "두 번은 절통의 눈물을 흘렸고 지금은 환희의 눈물을 흘린다" 며 감격했다. 브리핑을 맡았던 김연아는 평소 경기에서 보여준 강심장 면모와 달리 "온 나라를 내 어깨에 짊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고 말하기도 했다.
조광래 전 축구대표팀 감독은 최근 전격 해임통보를 받은 다음 날 "조기 축구회 감독을 해임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방식은 말이 안 된다" 고 분통을 터뜨렸다. 바통을 이은 최강희 감독은 전북을 이끌며 '닥공(닥치고 공격)' 이란 신조어를 유행시켰다. 공격축구를 지향하겠다는 뜻으로, 전북은 올 시즌 경기당 역대 최다인 2.23골을 기록하며 우승했다.
장재용기자 jyjang@hk.co.kr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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