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8시께 최태원 SK회장이 서울 종로구 서린동 본사에 출근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지만 SK임직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회장을 맞았다. 전날 밤 9시부터 새벽 5시35분까지 20시간 동안 혹독한 검찰 조사를 받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택에 잠시 들렀다 바로 회사로 직행한 것이다.
최 회장은 나오자마자 지주회사 김영태 사장을 불렀다. 전날 조사를 받는 도중 터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사건을 보고받기 위해서다. 이어 관련 임원들을 불러 북한 발(發) 돌발 상황으로 예상되는 파장과 이에 대한 차질 없는 대응을 당부했다.
최 회장의 이후 행보는 더욱 거침 없었다. 22일에는 경기 이천의 하이닉스반도체 공장을 직접 방문했다. 지난달 인수가 사실상 확정된 뒤 처음이었다. 하이닉스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반도체 산업 불황에다 SK그룹의 검찰 수사까지 겹치면서 경영정상화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었다.
최 회장은 "하이닉스의 경영정상화와 성장을 위해 발로 뛰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 실사가 마무리되진 않았지만 반도체 산업은 시간과의 싸움이 중요한 만큼 SK가 적극적으로 성장방안을 찾아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하이닉스 임직원들에게 설명했다. 특히 수차례 '성장'을 강조하면서 인수 목적이 단순한 정상화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다음날인 23일 오전에는 그룹 주요 계열사 CEO들이 참석하는 긴급 사장단 회의를 개최했다.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와 검찰 수사 등에 따른 인사와 경영계획 차질 등을 우려하며 "사별로 CEO를 중심으로 경영에 흔들림 없이 매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업계에서는 최 회장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경영 현안을 직접 챙기며 위기를 돌파하려는 것으로 해석한다. 현재 SK그룹은 1998년 고 최종현 회장의 갑작스런 폐암사망 이후 13년 만에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게 안팎의 평가. 특히 2012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에서 그룹의 연말인사가 유보되고 내년 투자계획도 확정 짓지 못하자, 경영 누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 회장이 직접 팔을 걷어 붙인 것. 최 회장은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당시에도 이 같은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바 있다. 최 회장은 당시 사외이사 비율을 대표이사를 경질할 수도 있는 70%까지 올려 화제가 됐다. SK그룹 관계자는 "위기 때마다 정면돌파로 승부수를 던졌던 최태원 회장의 정공법이 다시 등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의 이 같은 행보에는 검찰 수사에 대한 자신감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관계자는 "최 회장과 SK는 내사기간을 포함해 1년 넘게 검찰수사를 받고 있다"며 "최 회장의 정면 돌파 행보는 단순히 경영 공백 차단을 위한 고육책이라기 보다는 그 만큼 자신에게 쏟아지는 혐의에 대해 자신이 있다는 태도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재계 3위의 대기업에 대해 장기 수사하는 것은 국가경제에도 좋지 않다는 게 재계의 정서. 전경련 관계자는 "검찰로서도 수사의 명분과 이유가 있겠지만 '스마트 수사'를 지향한다고 공언해온 만큼 신속히 수사를 마무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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