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인
달빛 나린 날부터 물 고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내 몸 어디에 물이 고이고 있는 걸까요 실핏줄 사이사이 물길이 열린 건가요 나는 잘 빚은 항아리 되어 날마다 부풀어 올라요 얼굴도 본 적 없는 외할머니가 아침마다 떠놓았다던 그 물 한 동이, 캄캄한 심장을 환하게 씻어주네요 홀로 물무늬 그리며 둥글게 부풀어가는 항아리, 누가 그 속에 물고기를 풀어놓은 걸까요 이제 막 눈을 뜬 물고기 한 마리, 아침마다 지느러미 흔들며 솟구쳐 오르네요 지느러미 닿은 자리마다 번지는 물내음 내 텅 빈 잠을 깨우네요 달빛으로 빚어진 항아리 속, 가만 두 손 담그면 안겨올 거예요 언젠가 내가 살아 나온 여자의 항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처럼 항아리 안에서 자라 또 하나의 항아리를 품게 될 투명하고 조그마한 물고기가
● 결혼한 지 꽤 된 지인에게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냐고 물었더니 출산파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군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의 개체수가 기형적으로 많으니 이 별을 위해 좀 줄어들어야 한다고요. 그 지성적인 발언에 탄생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놀란 말처럼 달아났는데, 시인이 다시 데려와 주네요. 달빛처럼 희고 예쁜 항아리에서 순한 생명이 자라나는 이야기. 이건 아이를 가져본 여자만 아는 느낌일까요? 공동체 운동가 란자 델 바스토는 이렇게 말했어요. “사물 속 깊은 곳에서 물고기가 헤엄친다. 벌거벗고 나오지 못하는 겁 많은 물고기. 내 너에게 상상의 외투를 입혀주겠노라.” 모든 사물 속에는 항아리가 있고 꿈의 조그만 물고기들도 있어요. 어른 아이 모두 그걸 낳을 거예요. 상상의 두툼한 외투를 입혀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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