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와 금융 전문가들이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언뜻 공통점을 찾기 힘든, 어울리지 않은 조합으로 여겨지지만, 요즘 국내 미술계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전공이 전혀 다른 이들이 의기투합한 것은 미술품 투자를 위한 가격 지수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단법인 한국미술품감정협회는 최근 한국미술시장가격체계(KAMPㆍKorea Art Market Price)를 구축하고, 미술품 가격 지수 'KAMP50 지수'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전인태 가톨릭대 교수(수학과 금융공학)를 비롯해 금융전문가들과 미술 전공자들이 모여 1998년부터 올 6월까지 국내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거래된 미술품의 낙찰 순위와 총 거래 금액 순위 등을 바탕으로 대표작가 52명을 추렸다. 이어 이들 작가의 작품 6,000여 점을 소재, 시기, 재료 별로 나눠 등급을 주고, 최고 등급 AAA로 분류된 작품의 10호(號) 당 가격을 산출했다. 1호는 인물화 기준으로 가로 22.7㎝, 세로 15.8㎝이다.
개발팀은 또 이를 바탕으로 평균 가격이 다른 작가들보다 월등히 높은 박수근(16억1,600만원)과 이중섭(13억5,900만원)을 빼고 나머지 50명의 대표작 10호당 평균 가격 추이를 나타내는 KAMP50 지수를 개발했다. 이 지수에 따르면 천경자가 4억5,000만원으로 가장 높았고, 김환기(3억4,255만원)가 2위였다. 장욱진(3억3,700만원), 이우환(1억8,900만원)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도 또 다른 가격 지수 'KAPAA INDEX'를 만들고 있다. 내년 1월 중 발표 예정인 이 지수는 5년에 걸쳐 경매시장에 주로 등장하는 작품의 작가 150명과 함께 일반 작가 850명 등 약 1,000명의 작품 가격을 분석한 결과라는 게 협회의 설명. 김태황 명지대 교수(국제통상학)를 비롯해 신형덕 홍익대 교수(경영학), 김명수 가톨릭대 교수(정경학부) 등 금융 전문가와 명지대 김영선 교수(디자인학부) 등이 참여했다.
미술품을 수치화하려는 시도는 국내가 처음은 아니다.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 '메이-모제스 지수(Mei&Moses Art Index)'. 이는 세계 최초의 미술품 가격 지수로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모제스 교수와 메이젠핑(梅建平) 교수가 함께 만들어 2003년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발표했다. 1875년부터 125년 동안 경매 기록을 바탕으로 1만2,000건이 넘는 재판매(같은 작품이 2번 이상 거래된 것) 사례를 분석했고, 해마다 700건이 넘는 재판매 기록을 추가하는 등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했다. 이 지수는 개별 작품의 가치뿐만 아니라 미술품 투자 시장의 동향을 보여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메이-모제스 지수와 미국 증시의 주요 지표 중 하나인 S&P500을 1953년부터 2003년까지 50년 동안 비교한 결과 S&P500은 100달러에서 2만5,000달러인 반면 미술품 지수는 100달러에서 3만 달러로 늘었다. 미술품이 주식 투자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올 들어 유럽의 재정위기로 주식 등 전통적 투자처 대신 미술품이 또 다시 대안 투자처로 부상하고, 전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이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지수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지난해만 전 세계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10조원 넘는 돈이 오갔고, 올 상반기에도 거래 규모가 전년 동기 대비 12% 상승했다.
국내 미술품 시장도 덩치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러나 각종 비자금 스캔들과 루머로 신뢰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한국형 지수 개발은 국내 미술품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다. 작품성, 이력, 전시 횟수 등을 근거로 미술품 가격도 아파트 가격처럼 투명하게 시스템화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미술품 거래에서는'경험'이 중요한 기준 노릇을 했다. 작가가 이혼(divorce)을 하거나 사망(death)하거나 파산(default)하면 가격이 올라간다는 '3D', 세로 그림보다 가로 그림이 비싸고, 얇게 칠한 것 보다 두껍게 칠한 그림, 어두운 그림보다 밝은 그림이 잘 팔리고 가격이 잘 나온다는 식이었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미술품 시장의 질적 성장을 위해 고가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중저가 작품을 구입하려는 일반인의 참여가 늘어나야 하고 이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할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가격지수는 금융기관에서 담보가치, 회계업무를 위한 공정가치, 증여 및 기부 등의 방법으로 가치를 산정해 과세 표준 선정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것으로 보인다. 김영선 교수는 "기존 경매 시장에서 작품을 팔고 있는 몇몇 유명 작가를 제외한 대다수 무명 작가들은 자기 작품의 적정 가격이 얼마인지 모른다"며 "이들 제품도 경매 시장에서 팔리도록 해 침체된 국내 미술 시장을 살리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100% 완벽한 가격 지수를 만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가격 지수는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이므로 여기에 너무 기대면 가장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즐기는 일에 소홀할 수 있다"며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보면서 투자 대상으로서 가치를 따져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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