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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맨발의 디바' 에보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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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 사람/ '맨발의 디바' 에보라 별세

입력
2011.12.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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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에서 서쪽으로 500여㎞ 떨어진 곳에 카보베르데라는 섬나라가 있다. 인구 50만명에 화산섬 10개로 이뤄진 이 나라는 다 합쳐 봐야 전라북도 면적의 절반(4,033㎢)에 불과한 별 존재감 없는 국가다. 세계지도를 유심히 들여다 봐도 몇 개의 점으로 밖에 표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외신들이 17일 이 나라 출신 여가수의 부음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다. 세자리아 에보라. '맨발의 디바'라는 애칭이 더 익숙한 카보베르데의 국민 영웅이다. 에보라는 조국의 음악 장르 모르나(Morna)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70세를 일기로 타개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것은 음악적 재능 못지 않게 에보라의 노래에 담긴 짙은 메시지 때문이다.

유럽을 녹인 영혼의 목소리

에보라는 1941년 상비센테섬의 항구도시 민델라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을 켜는 아버지와 작곡가였던 삼촌을 둔 덕분에 음악적 향취를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가수의 길은 숙명처럼 찾아왔다. 7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원으로 보내진 에보라는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15세 무렵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술집이나 지역 방송국에서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항구에 정박한 뜨네기 선원들 앞에서 솜씨를 뽐냈다. 훗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맨발로 노래하는 습관은 이 때 길들여졌다.

실력은 출중했지만 무대는 하나같이 보잘 것 없었다. 인고의 세월을 감내한 그에게 1985년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포르투갈로 건너간 에보라는 평생의 은인이자 음악 프로듀서인 호세 다 실바를 만나게 된다. 실바와 의기투합해 88년 프랑스 파리에서 발매한 첫 앨범 '맨발의 디바'는 대박을 터뜨렸다. 유럽인들은 구슬픈 목소리를 토해내며 맨발로 무대를 휘어잡는 흑인 여가수에게 단박에 열광했다. "영혼을 무장해제하고 한줌의 울림까지 끌어내는 마력"(르몽드) "멜랑꼴리의 천재"(뉴욕타임스) 등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BMG 등 세계적 음반사들이 그와 손잡기를 원했고, 앨범은 내는 족족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92년 발매한 4집 앨범 '미스 페르푸마두'는 프랑스에서만 30만장이 넘게 팔렸다. 에보라는 2003년 앨범 '보스 다모라'로 마침내 월드뮤직 부문 그래미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평범하지 않은 슬픔, 모르나

에보라의 성공 뒤에는 카보베르데의 토속 음악 모르나가 있다. 모르나는 포르투갈 화성에 아프리카 고유의 리듬을 결합한 장르다. 언뜻 삼바나 리듬앤블루스(R&B)의 아류처럼 보이지만 곡조가 유달리 애처롭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이를 "형언하기 어려운 영혼의 소리"라고 평했다. 모르나는 역설의 음악으로 불린다. 슬프지만 겉으론 내색을 안하는 우리네 애이불비(哀而不悲) 정서와 닮아있다. 에보라의 음색은 처연하나 슬픔이 결코 비루하지 않은 것은 조국의 척박한 역사를 음악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카보베르데는 300년 가까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으며 노예선 정박지로 악명을 떨쳤다. 인종은 백인과 인디오를 섞은 크레올이 대부분이고, 뿌리 깊은 가난 탓에 인구의 3분의 1은 해외를 떠돌고 있다. 에보라는 빈곤과 잡혼(雜婚), 이산 등 카보베르데의 불편한 진실을 오롯이 자신의 노래에 투영하고자 했다. 에보라는 생전 "음악을 통해 상실의 아픔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국의 품에 잠들다

무대를 벗어난 에보라는 외로웠다.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는 술과 담배다. 공연 도중 약간의 짬이라도 나면 줄창 담배를 피워댔고, 무명 시절 코냑 한 잔만 주면 술집에서 거저 노래를 부를 정도로 술에 탐닉했다. 한 번도 정식 결혼을 안했지만 3명의 남자에게서 씨가 다른 세 자녀를 낳았다. 펑퍼짐한 몸매에 움푹 꺼진 눈, 초점 없는 눈빛은 에보라의 고단한 인생을 그대로 대변한다. 한 음악평론가는 "담배와 술에 찌든 둔탁한 목소리가 오히려 보편적 감수성을 자극한다"고 했다.

폭음과 과도한 흡연은 결국 노가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에보라는 심장 이상으로 공연을 중단한 지 3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그는 2001년 인터뷰에서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카보베르데에서 위대한 가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국은 바람대로 에보라의 마지막을 넉넉히 품어 주었다. 카보베르데 정부는 에보라가 숨진 날부터 이틀간을 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떠난 영웅을 기렸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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