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보궐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10월 인문학자 엄기호(40)씨는 후배와 길을 걷다 선거 현수막을 지나쳤다. 후배가 '내 삶을 바꾸는 첫 번째 서울시장'이란 박원순 후보 현수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저 현수막, 졸라 마음에 안 들어. 자기가 뭔데 내 삶을 바꾸겠다 말겠다 하는 거야?" 후배는 자기 삶을 바꾸는 시장이 아니라 삶을 응원하는 시장을 바랐다.
엄씨는 신간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웅진지식하우스 발행)에서 이렇게 자신과 주변인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문제를 성찰한다. 지난해 발간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가 자신이 가르친 대학생들의 리포트를 바탕으로 20대 담론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대학생, 자신의 친구와 동료, 인권운동 하며 만난 이들을 통해 금융자본주의 시대 우리 삶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는 "지금 시대를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는 데 반대한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를 비롯해 사회 체제는 분석과 통제가 가능하다는 걸 전제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질서가 없기 때문에 통제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유다.
엄씨는 외환위기 직후부터 대학 강단에 선 경험을 토대로 파국이 전세계적 위기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있다고 말한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는가'란 물음에 외환위기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은 '그렇게 믿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다고 말하는 학생이 드물다. 사람들이 삶을 예측하고 통제하며 기대를 품는 일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를 불안해 하는 건 대학생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희망은 고사하고 '하면 된다'는 기대마저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격노한다. 문제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화풀이 하고, 일이 되지 않을 수만 가지 이유를 들며 세상을 냉소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임계치에 도달했다"고 진단하며 "희망을 찾으려면 이 파국을 함께 견딜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월가 점령 시위나 중동의 민주화 혁명, 국내 촛불시위와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은 동료가 주는 '용기'가 희망을 만든 사례다. "1980년대 학생운동세대가 지금 20대보다 개인적으로 더 용기 있었던 건 아닐 거예요. 함께 팔짱을 낀 친구가 바리게이트를 지킬 수 있는 용기를 준 거죠. 인간이 인간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제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엄씨는 2001년부터 필리핀에 있는 국제가톨릭학생운동 아시아태평양사무국에서, 2004년부터는 '국제연대 코디네이터'를 자처하며 여러 국제인권단체에서 일했다. 지금은 대학에서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을 가르치고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 교육공동체 벗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그는 "대중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중의 언어로 인문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책에 '졸라' '씨바' 같은 비속어가 많이 나와 편집자가 애를 먹었는데, 그런 말들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런 말을 통해 대중이 어떤 공감을 갖는가를 설명하는 게 인문학자로서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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