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깊은 슬럼프를 겪었어요. 힘든 시간을 보낸 제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들을 모아, 자기 위안 같은 앨범을 만들었죠."
루시드폴(본명 조윤석ㆍ36)에게 지난 여름은 고통과 상처의 시간이었다. 2년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었고 아버지의 병환에 가슴을 졸였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음악인으로서 자신이 무능하고 초라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21일 출시된 5집 '아름다운 날들'은 그가 음악인으로서 빛을 잃어가는 듯한 위기감에 직면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했을 앨범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음악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스위스에서 생명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펼쳐질 전도양양한 과학자의 길을 모두 버리게 할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과학 공부 못지 않게 힘든 시기를 음악 인생에서도 겪었지만 결국 그는 음악에서 희망을 찾아 냈다. 앨범 제목 '아름다운 날들'은 "지나간 것일 수도 있지만 또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번 앨범에서 그는 평소 해보고 싶었던 악곡들을 다양하게 시도했다. 삼바 리듬을 차용한 '그리고 눈이 내린다'와 쿠바 음악의 느린 리듬을 가져온 '어부가'에서는 남미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노래의 불빛'에선 1990년대 4비트 인디 록을 재현했다.
노랫말은 이전 앨범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은유를 즐기던 그는 새 앨범에서는 "가사 뒤에 숨은 각운 같은 것에도 신경을 썼다"고 했다. 과거 곡에 종종 등장하던 사회적인 이슈는 새 앨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어젯밤 담담히 멎은 사랑뿐인데'('어디인지 몰라요' 중에서) '외롭고 행복했던 시간 이젠 조금씩 사라지고 있겠지'('그 밤' 중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가녀리고 낮은 목소리의 조합이 변함 없는 새 앨범은 "내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자기 치유의 음악인 셈이다.
루시드폴의 가요계 데뷔는 1998년 인디 밴드 미선이를 통해서다. 미선이 1집 'Drifting'은 지금도 평론가들 사이에 회자되는 수작. 솔로 활동에 나선 뒤에 미선이의 골수 팬들에게서 '변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목소리가 달라진 건 있어요. 그 시절 앨범을 들어보면 무척 어둡거든요. 지난 10년간 연습이나 공연, 녹음을 많이 하다 보니 경험이 쌓인 거겠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2만장'"이라며 앨범 판매는 변함 없다고 웃었다.
과학자의 길을 포기한 데 대해 그는 "공부는 원 없이 해서 전혀 아쉽지 않다"며 미련이 없다고 말했다. 서운해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젠 휴대폰 벨소리를 자신의 곡으로 할 정도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의욕과 희열을 잃지 않고 오래오래 음악 하는 게 목표입니다. 나이 들어도 '구리지' 않은 음악을요."
고경석기자 kav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