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아 수십 년간 북한의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북한 정권의 1인자로서 김정일의 통치는 김일성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에 시작됐다. 하지만 김정일은 김일성이 자신을 후계자로 공식 내정한 1974년부터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해왔다고 봐야 한다.
북한 당국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 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초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출생연도를 1941년이라고 했다가, 1982년부터 1942년으로 바꿔 선전해왔다. 김일성 출생연도(1912년)와 같은 해에 대규모 경축 행사를 열기 위해 1년을 늦췄다는 게 정설이다.
김정일의 출생지는 러시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한은 1980년 이후 출생지를 백두산이라고 선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으로 입국했다. 유년시절은 유복하지 못했다. 남동생이 익사한 데 이어 7세 때 생모 김정숙이 세상을 떴다. 김정일은 계모 김성애 손에 의해 성장하면서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계모 및 이복형제들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여야 했다.
휴전 후 김정일은 평양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김정일이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권력 승계를 위한 경험 축적과 자질 향상 등을 위해 힘을 쏟은 시기였다.
그는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이어 1967년부터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지내면서 국가 정책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적발해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등 예술 부문을 전담하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각하고 유일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영화 가극 소설 등을 대거 창작함으로써 후계자 지위를 굳건히 했다.
김정일이 권력 장악을 위해 가장 몰두했던 일은 최대 정적이었던 친인척 제거였다. 삼촌 김영주는 1970년대 후반 자강도 강계로 쫓겨나 외부와 격리된 채 유배생활을 했다. 김영주는 1990년대 초 부주석으로 복원됐지만 이미 모든 세력을 잃은 뒤였다.
1975년부터는 계모 김성애와 김평일 등 이복동생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조사해 추방했으며, 이복동생들은 모두 해외에 내보내 국내에서 새로운 추종 세력이 형성될 여지를 원천 차단했다.
김정일은 이후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임을 대내외에 공식 알렸다. 또 1990년 5월 국방위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이후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지만 북한의 모든 상황은 최악이었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 붕괴돼 수 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당국의 통제 기능은 사실상 마비 수준이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 대한 3년상을 빌미로 '유훈 통치' 기간을 설정하며 통치 기반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김정일은 물리적 강제력을 보유한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에 군을 우대하고 군에 의존하는 군부 통치로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 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고,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됐다.
김정일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군부 통치는 '선군 정치'로 명명됐고 김정일 시대의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집권 이후 그는 남쪽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파격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했으며 2000년에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또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가졌다.
그는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섰고, 2002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 회담을 갖는 등 북일수교에 이은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노리기도 했다.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해 서방과의 외교에서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지만 내부적으로는 핵 실험에 몰두하는 등 이중적인 자세를 취했다. 2006년 10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뒤에는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그대로 노출했다.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 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다. 당시 경제적으로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하는 바람에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며 남측의 원조가 끊기자 김정일은 2010년 5월, 2010년 8월, 2011년 5월 등 1년여 기간 동안 모두 세 차례나 중국을 방문, 경제원조를 겨냥한 황금평ㆍ나진 특구 건설에 합의하기도 했다. 2011년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가스관 연결사업에 합의하는 등 마지막까지 북한 경제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사정원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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