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18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를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선해결을 촉구하는 '작심 발언'을 했다. 노다 총리는 이에 맞서 이 대통령에게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비' 철거를 요구했다. 이날 일본 교토(京都) 영빈관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논의가 아니라 '설전'을 방불케 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9시13분부터 10시10분까지 진행된 회담에서 거의 50분을 할애해 위안부 문제의 우선 해결을 요구했다. 노다 총리가 제기한 한일 자유무역협정(FTA) 논의 재개를 비롯한 경제 문제에 대해선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고, 대북 대응 협력과 역사 공동 연구에 대해서만 원론적 차원에서 언급했을 뿐이다.
이 대통령의 작심 발언은 실무진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실무진은 대통령께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할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도 했지만 이렇게 큰 비중으로, 세게 (거론)하실 줄은 몰랐다"며 "대통령이 결단한 것 같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지금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86세인데 몇 년 있으면 다 돌아가실 수도 있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63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본인들의 목소리는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이러면 양국간 해결하지 못하는 큰 부담으로 남게 된다"면서 노다 총리의 정치적 결단을 압박했다. 이날 정상회담의 공개 부분 모두 발언 순서에서 일본 정부는 노다 총리의 공개 발언이 끝나자 이 대통령의 발언 순서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취재진들에게 퇴장을 요구해 빈축을 샀다.
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마치고 교토의 대표적 문화유적지인 료안지(龍安寺)를 노다 총리와 함께 방문한 자리에서도 "양국 협력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두 정상 사이의 냉랭한 기류는 료안지 시찰이 예정 시간보다 앞당겨져 서둘러 끝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앞서 17일 열린 정상 만찬에서도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작심하고 위안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일 간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위해서 정치적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양국 정상이 위안부 문제로 충돌한 것은 각각이 처한 자국 내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위대원이었던 아버지를 두고 있는 우파 인사인 노다 총리가 한일 과거사, 특히 일본군과 관련된 위안부 문제에서 밀렸다는 인상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해석이다. 취임 후 세 달이 갓 넘은 노다 총리의 지지율은 처음 40%대에서 30%대로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도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이 비등하고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요집회 1,000회와 평화비 건립으로 양국 외교 현안으로 급부상한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각에선 "돌아선 민심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배상 등을 위한 양자 협의를 일본 측에 제안한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일본이 아무런 성의를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동국기자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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