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오래 해왔지만 상은 처음입니다. 얼마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잘 하라는 격려 같네요."
천병희(72) 단국대 명예교수가 낸 첫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서는 플라톤의 <국가> 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이었다. 책이 나온 1972년은 그가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10년 형을 선고 받고 3년 2개월만에 특별사면으로 풀려 나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독일 유학시절 북한에 다녀왔다가 정치범으로 몰린 그는 그러나 여전히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10년 자격정지라는 굴레가 들씌워져 대학 강단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운 그를 보다 못한 선배가, 대학 시절부터 그리스어에 관심이 많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원서로 읽었고 독일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검정시험에 합격한 그에게 휘문출판사의 번역 일을 소개했다. 정치학> 국가>
"본격적으로 번역에 몰두한 건 1990년대 중반부터입니다. 원래 대학에서 은퇴한 뒤 해 볼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책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거예요. 아이쿠, 뒤로 미루다가는 시력이 나빠져 하고 싶어도 못하겠다 싶어 얼른 시작해 단국대출판부에서 냈죠. 그때 글자가 제대로 안 보인 건 지나고 보니 전날 숙취 탓이었지만 허허."
그렇게 방학 등을 활용한 번역 작업은 서울대 독문과 학생시절 하루 50줄씩 어렵게 읽었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를 비롯해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등 문학 고전이 중심이었다. 거기에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 에세이류,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역사ㆍ철학 책까지 망라하면 "60종 정도"를 헤아린다. 올해에만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와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를 냈다. 적어도 문(文)사(史)철(哲)을 아우르는 서양 고전 원전 번역의 양에서는 국내에서 천 교수를 따라 올 사람은 없다. 펠로폰네소스> 페르시아> 역사> 명상록> 아리스토파네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변신이야기> 아이네이스> 신들의> 오딧세이아> 일리아스>
수상작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중심이 돼 그리스 도시국가를 양분해 벌인 전쟁의 경과를 아테네 군을 지휘한 장군이 기록하고 분석한 책이다. 국가간의 패권을 정치적 현실주의 관점에서 서술해 헤로도토스의 <역사> 보다 분명한 역사학적 방법론이 깃들어 있는 서양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 받는다. 천 교수는 "원전만 읽어서는 의미가 알쏭달쏭한 투퀴디데스의 문장"을 영역본과 독역본 5, 6종을 참고해가며 정확하고 읽기 쉽게 번역해내려고 애썼다. 역사> 펠로폰네소스>
2004년 단국대 정년 퇴임 후 대학 출판부에서 냈던 책들을 다시 손 봐 숲 출판사에서 모두 새로 냈다. 이후 새 번역도 모두 이 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다. 직역을 원칙으로 한 초기 번역은 "잘 읽히지 않는다"는 독자 반응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숲에서 편집을 맡아 본 강규순 대표가 의미가 통하지 않거나 너무 딱딱한 문장을 꼬치꼬치 잡아내 윤문을 닦달한 덕을 크게 봐 요즘 독자들은 "번역이 매끄러워서 읽기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천 교수는 지금도 하루 6시간 서울 송파구 자택에서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대학에서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이 생겼고 거기서 학위 받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으니 앞으로는 서양 고전 번역 인구도 늘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서양 문화의 수원지인 그리스 라틴 고전 번역은 온전히 천 교수의 몫일 것 같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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